비바람 부는 바르셀로나, 악천후에도 행복했던 이유

유종선 2023. 5. 5. 18:2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같이' 극복하는 아빠와 아들... 맞잡은 손이 신났다

N년차 드라마 피디이자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함께 22일 간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 기록을 담은 여행 에세이입니다. <편집자말>

[유종선 기자]

우리가 합류한 가우디 투어의 첫 장소는 '구엘 공원'이었다. 투어는 바르셀로나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콘셉트여서 초반의 개괄 설명과 단체 이동을 놓친 것 외에는 그럭저럭 잘 따라잡은 셈이었다.
 
▲ 구엘공원의 동화같은 후문 비가 조금씩 오고 있다
ⓒ 유종선
가우디에 대한 나의 상식은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건축가라는 사실 말고는 전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 속으로는 약간 과장된 찬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편이었다. 유럽 어디라고 근사하고 멋진 위용의 건축물이 없겠는가. 가우디의 도시라고까지 묘사하는 건 과장 아닌가.

그리고 사진에서 보던 가우디의 건축들의 모양은 어린이 놀이공원을 위해 지은 동화 속 건물같은 느낌이었다. 귀엽긴 한데 이게 그렇게 대단한가 싶은. 어딘가 모르게 가짜 돌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러나 실제로 본 가우디의 건축물은 예상과는 크게 달랐다.

실제 돌로 지어진 건물이 주는 위압감은 대단했다. 진짜 돌을 가공하기 어렵기에 가짜 돌을 만드는 어린이 놀이공원의 논리와는 반대의 건물이었다. 진짜 돌로 만들어내기 어려운 모양을 연출하여 실제로 지어놨다는 존재감이 강렬했다. 모든 선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규칙이 있는 듯하지만 각각이 다르게 뻗어나가는 모습이 압도적이었다. 건물을 유기체처럼 느끼고 관계 맺게 되는 느낌이랄까.

구엘 공원, 까사 밀라, 까사 바트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까지 생애 처음으로 가우디에 입문했다. 짧은 시간에 그 공간을 이해하고 즐기진 못했으나, 예상치 못한 경이가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문의 열쇠를 얻은 기분이었다. <이웃집 토토로>의 고양이 버스처럼 우리를 자기 안에 들여 앉힐 수 있는 거대 공룡들을 본 것 같달까.

여행자의 정체성, 어른의 정체성 
 
▲ 구엘공원의 길 <꽃보다 할배>의 출연진도 걸었던
ⓒ 유종선
우주는 <꽃보다 할배>에 나왔던 반 동굴 같은 구엘 공원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에 극강의 행복을 느끼는 듯 했다. 구엘 공원 안에는 놀랍게도 학교도 있었다. 쉬는 시간이었는지 아이들이 삼삼오오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지나갈 때, 높은 울타리 담을 넘어 공이 바깥으로 떨어졌다. 아이들이 철망에 달라붙어 밖으로 떨어진 공을 쳐다보았다. 난 힘껏 다시 공을 던져 운동장 안으로 돌려주었다. 'Thank you!', 'You're welcome!' 그 순간이 매우 새로웠다.
 
▲ 구엘 공원 안의 학교 삼삼오오 농구와 축구를 하는 아이들
ⓒ 유종선
여행 도착 후 해온 모든 행동 중에 처음으로 결이 다른 행위였다. 돈이 오가지 않고, 관광의 목적 없이, 내가 현지인에게 호의를 갖고 도움을 준 행위. 그리고 그 행위로 인해 아이들의 공놀이는 당혹감 없이 신나게 다시 이어졌다. 마침 그 순간에 그 곳을 지나간 사람이 우리 밖에 없었기에 가질 수 있었던 상호작용. 그 작은 순간이 마음에 깊게 남았다.

한 10여 초간, 스페인 현지인과 한국인 관광객이 아니라 당황한 아이를 도와줄 수 있는 어른이었던 순간이었다. 의도하지 않았던 결이 다른 행위가 여행자의 정체성을 잠시 가볍게 흔들어주는 느낌이 좋았다.

악천 후 여행의 참맛 

비가 내렸다. 준비해온 노란 우비를 우주에게 입히고 나는 우산을 썼다. 잔뜩 흐리고 을씨년스러웠다. 바르셀로나에 이런 날씨는 드물다고 했다. 수학여행 온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모여 있다가 우주의 노란 우비를 보고 귀엽다는 듯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닐 때 은근히 뿌듯하면서 의기양양해지는 순간.

구엘 공원, 까사 밀라, 까사 바뜨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설명을 듣는 동안 빗줄기는 강해졌고 바람은 세찼으며 기온은 떨어졌다. 사람들이 점점 다 젖으면서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힘들어보이는 건 가이드였다. 젊은 여성분이었는데, 우산을 쓰지도 못하고 패드를 꺼내 계속 자료를 보여주면서 설명을 해야 하는데, 코 끝과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추워보였다.

그만 설명하고 해산해도 될 정도로 모두들 추운 느낌이었지만, 그런 제안을 하기엔 모두가 먼 곳으로 여행 와서 가이드를 신청한 사람들이었다. 가이드 역시 자기 할 바를 다 해야만 개운할 입장일 것이다. 모두 오들오들 떨면서, 또 오들오들 떠는 가이드를 안쓰러워하면서 투어를 마쳤다.
 
▲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강렬한 개성의 대성당
ⓒ 유종선
수신기와 이어폰을 반납하면서 말했다. "너무 고생하셨어요. 감기 걸리시겠다...." "이미 걸렸어요." 평온하기만 할 수 있었던 가이드 투어가 격렬한 직업의 현장이 되어버린 걸 목격한 날이었다.

대성당 안에 들어가서 우주 엄마와 영상통화를 하며 우리의 안전을 전했다. 어찌보면 망친 날이었다. 투어 지각과 쓸데없이 많이 쓴 교통비, 아침의 눈물 바람으로 인한 감정 소모, 햇살 한 점 없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추위. 성당의 탑 출입권도 샀는데 악천후로 출입조차 취소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우주와 나의 기분은 매우 좋았다. 우리는 같이 고난을 극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을 헤메며 울다 제 궤도로 돌아왔고, 날씨가 추운만큼 서로 꼭 붙들며 끝까지 설명을 들었다. 학생들에겐 공을 돌려주고 가이드의 건강도 걱정해주었다. 우리 둘이 같이 단단하게 그 곳에 존재하기 시작한 기분이었다.

성당 안에서 미리 싸온 귤을 까먹으며 우주와 난 가벼운 흥분을 나누었다. 우주는 한나절만에 고난을 극복한 소년이 되어 있었고, 나는 그 소년의 감정을 고스란히 공유했다. 혼자였다면 날씨를 보며 불운이나 탓했을 텐데.

스페인어로 소통하기 시작한 아들 

성당을 나왔다. 밥을 먹으며 우주는 공부한 스페인어를 썼다. '올라', 인사를 하고 '오늘의 요리(메뉴 델 디아)'를 물어보고, '물(아구아)'을 주문했다. 대견해하는 점원들과 또 두어 문장을 나누었다. 소년은 또 하나의 퀘스트를 깨기 시작한 표정이었다.

철 없는 아빠는 은근슬쩍 설명한다. '얘가 스페인어를 이 주간 공부하고 여행왔어요.' 현지인들이 칭찬해주자 우주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이 초승달이 된다. 아들이 느끼는, 스페인어로 소통했다는 만족감이 나까지 전염된다.

충분히 쉰 우리는 거리로 다시 나왔다. 구글 지도를 보며 여기 저기 계속 걷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몰아칠 수록 마주잡은 손이 더욱 신났다. 여행의 첫 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모든 게 설렘이었다. 해가 져가며 도시의 불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바르셀로나 거리는 곱게 빛을 반사시켰다. 아름다웠다.
 
▲ 비에 젖은 바르셀로나 거리 숙소로 향하는 길
ⓒ 유종선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