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난지 어느덧 1년…"존재해줘서 감사" 추모 쏟아졌다

나원정 2023. 5. 5.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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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1주기 강수연 영화계 애도
전날부터 추모전 '영화롭게 오랫동안'
추모집 『강수연』 봉준호 손편지
"누님은 늘 영화였어요"
강수연 1주기 추모집 『강수연-배우이자 친구였던, 우리에게 과분했던 기적』이 7일 고인의 1주기에 맞춰 발간됐다. 표지(사진) 속 흑백사진은 영화 '베를린 리포트' 당시 현장에서 촬영된 강수연의 모습이다. 사진 강수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나의 미미에게. 언제나 당신을 동경했어요.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정화야!’라고 이름 불렀던 날 너무 기뻐서 기절할 뻔했죠….”
배우 엄정화는 고(故) 강수연(1966~2022)을 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속 당돌한 대학생 미미로 기억했다. 그가 데뷔 초 짙은 아이섀도와 아치형 눈썹을 고집한 건 ‘원조 아이돌’ 강수연에 대한 동경이었다.
지난해 뇌출혈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배우 강수연이 7일 1주기를 맞는다. 전날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개막하는 1주기 추모전 ‘강수연, 영화롭게 오랫동안’ 개최에 맞춰 그의 이름을 딴 추모집 『강수연』도 발간됐다. 부제 ‘배우이자 친구였던, 우리에게 과분했던 기적’은 지난해 넷플릭스 출시작 ‘정이’를 함께한 연상호 감독의 추도사에서 따왔다.

강수연 1주기 추모집 『강수연』 수록 화보. 사진 구본창 작가, 강수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3살에 아역 데뷔해 “자라온 과정에서 영화를 떠난 생활이 없었다”는 강수연. “영화인이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라는 입버릇처럼 영화계의 든든한 ‘맏딸’ 역할을 자처했다. 추모집엔 그에 대한 영화인들의 사무치는 그리움이 가득하다.
“강하지만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배우 박중훈) “어린아이같이 천진하면서도 늘 든든했던 후배.”(배우 안성기) “무비스타, 당찬 여성, 소녀 가장.”(류승완 감독) “존재해줘서 감사해요.”(엄정화)….

아역 시절 강수연 출연 작품. 왼쪽부터 '별3형제'(1977) '슬픔은 이제 그만'(1978). 1주기 추모집 『강수연-배우이자 친구였던, 우리에게 과분했던 기적』 중에서. 사진 강수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영화감독 겸 평론가 정성일의 배우론을 시작으로, 봉준호 감독, 배우 설경구‧김현주의 손편지, 소설가 정세랑의 추도사, 영화감독 임권택‧이명세‧배창호, 부산시와의 갈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부산 영화제를 함께 이끌었던 김동호 전 이사장, 배우 안성기‧박중훈 등의 추억담이 강수연의 생전 모습이 담긴 공식 기록 및 미공개 사진들과 함께 수록됐다.
1987년 제4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로 아시아 최초로 수상한 최우수 여우상을 기념한 얼음조각 상패가 색동옷을 입은 70여권 사진첩과 함께 ‘한국 최초 월드스타’ 강수연의 역사를 보여준다.


'아제아제…' 비구니 위해 삭발·6개월 절방생활


강수연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 당시 비구니 역할을 위해 삭발하는 과정을 담은 사진이다. 1주기 추모집 『강수연-배우이자 친구였던, 우리에게 과분했던 기적』 중에서. 사진 강수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강수연 1주기 추모집 『강수연-배우이자 친구였던, 우리에게 과분했던 기적』 중에서. 사진 강수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책에는 “강수연은 영리한 배우였다”는 임권택 감독의 추모사도 실렸다. 강수연은 1989년 임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던”(강수연) 서구 심사위원들로부터 여우주연상 낙점을 받았다.
이 영화의 비구니 역을 위해 그는 삭발 투혼은 물론, 촬영 6개월 전부터 절에 들어가 살기도 했다. 21세에 출연한 ‘씨받이’에선 출산 연기를 위해 출산 장면이 나오는 비디오테이프 10편을 일주일 간 보고 산모들의 체험담을 직접 찾아 들으며 공부했단다.
강수연 출연 영화 '됴화'(1987) 촬영 현장. 1주기 추모집 『강수연-배우이자 친구였던, 우리에게 과분했던 기적』 중에서. 사진 강수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영화 '연산군'(1987) 촬영 당시 강수연. 1주기 추모집 『강수연-배우이자 친구였던, 우리에게 과분했던 기적』 중에서. 사진 강수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그런 완벽주의로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1987), ‘연산군’(1987), ‘베를린 리포트’(1991), ‘경마장 가는 길’(1991), ‘지독한 사랑’(1996), ‘그대안의 블루’(1992),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등 코리안 뉴시네마 전성기를 이끈 영화부터 임 감독의 ‘달빛 길어올리기’(2010), 김동호 전 이사장의 연출 데뷔 단편 ‘주리’(2013), 8년 만에 현장 복귀한 유고작 ‘정이’까지 50여년 간 한국 영화 곁을 지켰다.
150부작 사극 드라마 ‘여인천하’(2001)의 주인공 정난정 역할로 SBS 연기대상 대상을 공동 수상하기도 했지만, 출연작 대부분이 영화였다. 자필 편지에서 봉준호 감독은 “누님은 늘 영화였어요. 고맙습니다”라고 추모했다.

봉준호 "강수연 누님은 늘 영화였어요"


강수연 1주기 추모집 『강수연-배우이자 친구였던, 우리에게 과분했던 기적』에 실린 봉준호 감독의 자필 편지. 사진 강수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강수연 1주기 추모집 『강수연-배우이자 친구였던, 우리에게 과분했던 기적』을 위해 봉준호 감독이 자필로 쓴 손편지. 사진 강수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데뷔 초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송어’(1999)를 함께하며 가깝게 지낸 설경구는 강수연을 ‘깡짱’이란 애칭으로 불렀다. 성격이 “깡다구에 당당하고 똑 부러져서”였다. 설경구는, 작품에서 자신이 타는 가마꾼 역할을 해준 배우 네 명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흰 봉투를 건네고, 영화 막내 스태프까지 챙기며 회식비를 도맡고, 수해를 입은 단골 가게 사장에게 거액의 수리비를 선뜻 내밀었던 “나의 싸부” 강수연이 정작 외로웠으리라 돌이켰다.
“‘나는 강씨에 백말띠에 옥니에 곱슬머리야’라고 웃으며 했던 말이 떠오르며 자그마한 체구에 강하고 또 강해야 된다는 무거움이 너무 버겁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설경구)
홍콩 스타 저우룬파(주윤발,왼쪽 사진부터), 훙캄보(홍금보)와 함께한 강수연. 강수연 1주기 추모집 『강수연-배우이자 친구였던, 우리에게 과분했던 기적』 중에서. 사진 강수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남성 중심의 영화계에서 그의 존재 만으로 의지가 됐다는 여성 후배들도 많다. 10대에 연기 데뷔해 ‘제2의 강수연’으로 불린 이정현은 강수연을 20대에 가수 생활을 하다 30대에 영화계에 돌아왔을 때 “누구보다 크게 환영하고 꼭 안아준 따뜻한 선배”로 기억했다.
지난해 넷플릭스를 통해 출시된 유고작 ‘정이’를 함께한 배우 김현주는 손편지에서 “우리 이제 시작이라 조급함 따위는 없었다”면서 “후회 많이 된다. 더 많이 안을 걸. 더 많이 사랑할 걸”이라는 늦은 고백을 했다. “가끔 꿈을 꾸면 선배님 웃음소리만 귓가에 남았다”면서다.

"나, 강수연이야" 호탕한 웃음 뒤의 고독


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로 공동 주연 박중훈과 흥행을 거둔 강수연. 1주기 추모집 『강수연-배우이자 친구였던, 우리에게 과분했던 기적』 중에서. 사진 강수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1991년 해외 영화제 및 촬영 현장에서 강수연. 1주기 추모집 『강수연-배우이자 친구였던, 우리에게 과분했던 기적』 중에서. 사진 강수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책 속 기고문에서 정성일 평론가는 “나, 강수연이야” 하던 그의 호탕한 웃음 이면을 이렇게 돌아봤다. “무언가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강수연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나, 강수연이야’라고 말하곤 했다”면서 “‘내가 해야 하니까 할 수 있다’라는 선언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종종 자기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만 같을 때가 있었다”고 했다.
이런 태도는 강수연의 연기 안팎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정 평론가는 “강수연은 (작품의) 인물 안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면서 ‘경마장 가는 길’의 대답들, ‘베를린 리포트’의 침묵, ‘지독한 사랑’의 표정들,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미소를 들었다.
또 “강수연에 대해서 말하는 순간 한국 영화의 한복판에 들어섰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면서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어떤 해에는 집행위원장으로 무대에 나타났지만, 어떤 해에는 자신의 영화가 초대 명단에 없는데도 누군가의 영화를 축하하는 포장마차 뒤풀이 자리에 나타났다. 강수연은 중심에 있었지만 동시에 주변에서 영화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면서 위성처럼 회전하고 있었다”고 했다.
생전 강수연 모습과 그를 추모하는 배우 설경구의 손편지(왼쪽). 1주기 추모집 『강수연-배우이자 친구였던, 우리에게 과분했던 기적』 중에서. 사진 강수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오빠가 있지만 가족 중 사실상 맏딸 노릇을 했고, 오랜 세월 영화계를 지키면서도 자신은 정작 힘든 내색 없이 홀로 버텨왔던 강수연이다.
“배우는 한번의 성공을 발판 삼아 다음의 성공으로 옮겨가는 게 아니라 매 작품 발가벗고 새롭게 임하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그는 생전 부단히 되새겼다. “나, 강수연이야”란 말은 어쩌면 그에겐 오랜 세월 홀로 설 수 있게 해준 마음의 지팡이 같은 주문이 아니었을까.

강수연 "배우는 매작품 발가벗고 새롭게 임하는 작업"


강수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에 따르면, 추모집은 6~9일 한국영상자료원‧메가박스 성수에서 진행되는 1주기 추모전을 거쳐 이달 중순 서점가에 배포될 예정이다.
6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강수연 대표작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처녀들의 저녁식사’ ‘달빛 길어올리기’, 7~9일 메가박스 성수에서 ‘씨받이’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아제아제 바라아제’ ‘경마장 가는 길’ ‘그대 안의 블루’ ‘송어’ ‘주리’ ‘정이’가 상영된다. 상영과 더불어 출연 배우‧감독 등의 관객과의 대화(GV), ‘그대안의 블루’ 동명 주제가를 가수 김현철이 부르는 특별 공연 등도 진행된다.
1주기 추모전 '강수연, 영화롭게 오랫동안'. 사진 강수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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