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독립영화 최전선, 선댄스영화제... "격변기 돌입했다"
[이선필 기자]
▲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전주컨퍼런스 패널로 참석한 애쉬 호일 선댄스영화제 프로그래머. |
ⓒ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지난 2년간 온라인 행사를 치른 선댄스영화제는 지난 1월 무사히 오프라인 행사를 진행했다. 대안 영화를 추구하며 다양한 예술영화를 품어온 선댄스영화제는 국내 여러 영화제들, 특히 독립예술영화 중심인 전주영화제와 그 결이 맞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제 기간 선댄스영화제의 애쉬 호일(Ash Hoyle) 프로그래머가 한국을 찾았고, 지난 1일 '엔데믹 시대 영화제의 역할'이라는 주제의 포럼 발제자로 나서기도 했다. 포럼 직전 <오마이뉴스>는 그를 만나 선댄스영화제의 정체성과 세계 영화 산업 전반 관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가 자신이 출연한 영화 속 배역을 따서 1985년 설립한 선댄스영화제는 약 40년 역사에서 늘 반짝였다. 북미 지역에서 전 세계 독립예술영화의 요람을 자처한 이곳은 팬데믹 기간 전임 집행위원장이 3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퇴진하는 등 내홍이 있었지만, 그 명성은 여전하다.
한국영화 중에선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가 2013년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바 있고, 재미 교포 어맨다 킴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가 올해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기도 했다. 그만큼 해당 영화제가 보폭이 미주나 유럽에 그치지 않고 국제적이라는 사실의 방증일 것이다.
"독립영화 지지 정체성 여전하다"
애쉬 호일은 "최근 몇 년 간 (코로나19 팬데믹 등으로) 문화적으로도 많은 변화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선댄스영화제의 정체성과 가치는 유지되고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예술과 예술가들은 이 세계를 문화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선댄스영화제를 살펴보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고, 그 격변을 다양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시간이었다. 특히 영화는 그런 창의성을 담아내는 매체기에 항상 변화해왔는데 선댄스가 처음 추구했던 가치, 즉 독립영화를 지지하고 창작자들을 한곳에 모아 흥미로운 작업을 이뤄내게 한다는 점에선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마 이 부분은 전주국제영화제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매년 서로 다른 감독, 작가, 주제의 영화가 상영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지형과 날씨가 험한 유타주, 그곳에서 심지어 한겨울인 1월에 영화제가 열림에도 세계 영화인들이 환호하는 이유는 선댄스영화제 특유의 환대와 프로그램 덕일 것이다. 해마다 편차는 다소 있었지만 매년 110여 편의 장편영화와 70여 편의 단편영화가 소개되는데 영화제 마지막날엔 로버트 레드포드가 직접 파티를 주최해 영화인들을 맞이하는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애쉬 호일은 "무엇보다 선댄스는 예술가들과 관객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말을 이었다.
"예술가들 입장에서 관계자들과 관객들, 언론이 본인들 작품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볼 수 있고, 영화 마켓에서 어떻게 거래가 이뤄지고, 어떤 작품이 상을 받는지 보면서 본인의 현재를 가늠할 수 있다. 선댄스를 찾는 다수의 관객은 영화 자체를 경험하기 위해 오시는 것 같다. 왜 선댄스에 오는지 물어보면 어떤 분들은 우연을 찾아서 온다고도 한다. 그만큼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의 선택을 믿는다는 뜻일 것이다. 유명한 영화를 보지 못해도 우연히 어떤 영화를 보든 괜찮은 작품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영화산업 관계자들을 연결시키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특히나 미국 외에서 온 감독들의 연결을 돕기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다."
사실 선댄스영화제는 일종의 쇼케이스 무대고, 본 사업은 선댄스재단(Sundance institute)을 중심으로 창작자 발굴과 지원 프로그램에 집중돼 있다. 복수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약 5천만 달러의 예산으로 운영되는데 180여 명의 상근 직원이 영화제 일과 랩(Lab) 관련 업무를 나눠서 맡고 있다. 애쉬 호일 프로그래머는 각 영역 별로 철저히 독립되어 운영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창작자 인큐베이션 경우엔 마치 정교분리하듯 영화제 일과는 완전 별개로 진행된다. 선정 과정에서부터 말이다. 제가 알기론 랩 프로그램만 20여 가지가 있고, 각 프로그램마다 10명 이상의 예술가들을 지원한다. 이것 외에도 집중 발굴 프로그램도 있다. 따지면 대략 수 백 편의 작품이 개발되거나 지원받는다. 그래서 꽤 많은 예술가들이 선댄스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재단을 처음 설립했을 때 핵심이 바로 창작자들이 머물며 작품을 개발할 수 있는 레지던스와 랩이었다. 주류 스튜디오에선 실현할 수 없는 어떤 비전을 만들어내고 지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여기에 (유타주에서 열리던) US 영화제를 통합하면서 랩에서 개발한 영화를 보여주거나 미국 내 풍부한 독립영화를 보여주는 식으로 진행됐던 것이다. 일종의 '쇼케이스'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애쉬 호일은 "전주국제영화제에 직접 방문해서 여러 프로그램을 보고, 어떻게 섹션을 나누고 있는지도 살피고 있다"며 "다국적 게스트들이 매우 다양하게 어우러져 영화제에 참여하고 있다는 게 인상적"이라 짚었다.
▲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전주컨퍼런스 패널로 참석한 애쉬 호일 선댄스영화제 프로그래머. |
ⓒ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
물론 지난 3년간 이어진 팬데믹은 선댄스영화제에게도 큰 시련이었다. "2년간 온라인으로 진행하다가 올해 다함께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그 에너지를 새삼 실감했다"던 애쉬 호일은 "코로나19 팬데믹은 선댄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영화 산업에서도 어려운 도전이었을 것"이라 말했다.
"선댄스는 운 좋게도 팬데믹을 거치면서도 유지될 수 있었는데 아마도 우리가 유연하면서 소박하게 행사를 운영한 덕인 것 같다. 온라인으로 전환한 것도 어떤 면에선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한 발 물러서서 평가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제를 기획하다 보면 1년을 거의 다 쓴다. 멈춰서 방향성을 생각할 기회가 사실상 없다시피 한데 지난 팬데믹 기간은 우리가 지금까지 내렸던 선택들을 살피고 평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때 결정이 맞는 거였는지, 왜 그렇게 했는지, 사람들은 우리 콘텐츠에서 무엇을 얻어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모든 상황이 급변함에도 창의적인 어떤 걸 제공한다는 본질은 변함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지금 이 순간이 어려워도 힘이 난다. 앞으로 선댄스는 팬데믹 때 시작한 온라인 상영을 병행할 것인데 상당히 큰 책임과 질문이 있는 결정이긴 하다. 예술가들과 관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맞춰가며 진행할 예정이다. 앞으로 남은 8개월 간 고민해봐야 할 일이다."
영화제 일을 하며 가장 보람있던 순간을 묻는 말에 애쉬 호일 프로그래머는 <코코모 시티>(Kokomo City) 상영을 꼽았다. 해당 작품은 선댄스재단 지원으로 탄생한 독립 다큐멘터리로 트랜스젠더 흑인들의 삶을 농밀하게 담아내며 지난 선댄스영화제 관객상은 물론이고, 베를린영화제에서도 관객상을 받았다.
"매우 독립적으로 제작된 저예산 다큐인데 영화제에서 엄청난 화제였다. 영화제를 하다 보면 프로그래머 입장에서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선택하는 영화들이 있는데 재밌는 건 그런 영화들이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코코모 시티>는 프리미어 상영 때 제가 감독님과 함께 소개를 맡았는데 상영 후 기립박수가 너무도 길어 QnA를 시작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무척 보람찬 순간이었다. 관객들이 이렇게 작고도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도 봐주는구나, 그만큼 다양하고 넓은 취향이 존재하는구나 새삼 깨닫게 돼서였다.
이 영화는 영화제 기간 가장 처음으로 판매된 작품이 되기도 했다. 매그놀리아 픽쳐스에서 구매를 했다. 이런 일이 제 개인적으로는 프로그래머와 영화제가 같이 해낼 수 있는 성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열정을 가진 감독이 처음 만든 영화가 이렇게 폭발적인 성과를 내는 모습도 영화제가 품을 수 있는 상징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애쉬 호일에게 영화제 자체의 독립성을 물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전주, 부천 등 국내 주요 영화제들 예산 구성이 해외 여러 영화제와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 또한 전했다. 지자체 예산 지원이 절대적인 국내 영화제와 달리 선댄스를 비롯한 해외 주요 영화제는 자부담률이 꽤 높은 편이다. 베를린영화제가 특수하게 약 80% 이상을 중앙 정부와 지자체에서 부담하는 구조고, 칸영화제나 베니스영화제 등은 지자체 지원 비중이 50%대다. (관련 기사: 전 세계에 부는 위기론, 영화제는 어디로 가는가?)
"미국은 영화제는 물론이고 창작자들에 대한 정부 지원은 상당히 적은 편이다. 선댄스영화제는 비영리 단체로 운영되는데 꽤 많은 사람들은 선댄스의 규모나 하는 일들을 보고 비영리가 아닌 어떤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비영리가 맞다. 이게 우리의 가치와 독립성을 지키는 방법이다. 특정 단체나 특정한 개인, 특정 회사에 의존하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산 구성을 보면 많은 후원자들이 있다. 개인도 있고, 재단도 있고, 기업들도 있다. 그리고 영화제 자체가 내는 수익들도 있다. 이런 수입은 아까 말씀드린 창작자 지원 프로그램에 투입되기도 한다. 물론 요즘이 무척 힘든 시기인 것은 맞다. 특히 선댄스는 미국 경기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선댄스를 후원하고 있고, 지원을 유지하고 있다. 그 덕에 선댄스영화제가 유지되고 있다."
전주영화제 기간 애쉬 호일은 한국 독립영화를 최대한 많이 보고 돌아가겠다는 다짐을 덧붙였다. 2021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첫 상영된 <원 포 더 로드> 예를 들며 그는 "홍콩의 왕가위 감독이 제작했고, 한국 영화인도 관여한 태국 영화인데 이처럼 선댄스는 아시아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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