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택한 여섯 여자, 그녀들의 한풀이 [연휴에 뭐 볼까]
왕과 결혼한 여자에겐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 ‘식스 더 뮤지컬’(이하 식스)은 허황된 환상을 깨고 살벌한 역사를 보여준다. 배경은 16세기 잉글랜드. 헨리 8세 아내들이 맞은 최후는 대부분 이혼 혹은 참수다. 아들을 낳고 병사한 셋째 왕비 제인 시모어의 신세가 좋아 보일 지경이다. 여섯 왕비 가운데 헨리 8세보다 오래 산 이는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 한 명뿐. 왕비들이 결혼 후 살아남을 확률은 17%도 되지 않은 셈이다.
‘식스’는 이들 왕비가 벌이는 신명 나는 한풀이 같다. 공연은 걸그룹을 결성하려 모인 왕비들의 리더 선발을 콘서트 형식으로 보여준다. 리더를 뽑는 방식은 기가 막힌다. “가장 어마어마하고 기가 막힌 개똥 같은 짓거리를 당한 사람”이 왕관을 차지한다. 왕비들은 춤과 노래를 무기로 ‘불행 배틀’을 벌인다. 첫째 왕비 아라곤은 헨리 8세의 거듭된 외도를 견뎠지만, 수녀원에 보내질 위기에 처한다. 두 번째 왕비 불린은 딸을 낳고 참수당한다. 헨리 8세의 유일한 사랑으로 알려진 시모어는 아들을 출산한 뒤 산욕열로 숨진다. 실물이 초상화와 다르단 이유로 이혼당한 클레페, 어려서부터 성적으로 착취당했던 하워드,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도 왕과 결혼해야 했던 파 등 나머지 왕비들도 하나같이 삶이 기구하다.
역사가 지웠던 왕비들의 목소리는 경쾌한 팝송으로 터져 나온다. “넌 날 쉽게 생각해/ 이혼을 해달래/ 웃기지 마”(아라곤), “실물 보고 달라서 실망했대/ 지만 실망한 줄 아나/ 작고 작은 너의 소중이”(클레페), “네가 원한 건/ 터치 미/ 넌 언제쯤 만족할 건데?”(하워드)…. 각 캐릭터와 노래는 실존 팝스타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강인하고 신념 강한 아라곤은 비욘세와 샤키라를 본떴고, 천방지축인 불린은 록스타 에이브릴 라빈과 릴리 알렌을 닮았다. 애절한 발라드를 들려주는 시모어는 아델과 시아, ‘스웨그’가 일품인 클레페는 힙합 전사 니키 미나즈를 떠오르게 한다. 추문에 시달렸던 하워드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아리아나 그란데를 합친 꼴이고, 유일한 생존자 파는 앨리샤 키스를 연상시키는 서정적인 음악을 들려준다.
‘식스’는 2017년 당시 대학생이던 동갑내기 친구 토비 말로우(작곡)와 루시 모스(연출) 손에서 탄생했다. 2019년 웨스트엔드와 2020년 브로드웨이에 차례로 입성했고, 제75회 토니어워즈 등 여러 시상식에서 11개 트로피를 거머쥐며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한국에서는 지난 3월부터 비영어권 지역 최초로 라이선스 공연이 열리고 있다. 삶을 선택할 수 없어 울분을 삼키는 이들이 어디 헨리 8세 왕비들뿐이랴. 작품은 시공을 뛰어넘어 2023년 한국 관객들에게도 공감과 사랑을 받고 있다. 공연기획사 아이엠컬처에 따르면 ‘식스’는 개막 한 달째인 지난달 25일 기준 예매처 인터파크에서 평점 9.8점(10점 만점)을 기록했다.
‘그’의 손으로 쓰여온 역사는 ‘그녀’들의 목소리로 바로 잡힌다. 작품 말미, 마지막 왕비 파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이 우릴 아는 이유가 뭐지?” 여섯 왕비를 고유한 개인이 아닌 헨리 8세의 왕비로만 정체화하는 역사적 관점을 꼬집는 대사다. 이런 문제의식은 불린의 입을 통해 더욱 선명해진다. “알겠다. 우리의 유일한 공통점은 남편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가부장적 구조에 뿌리 박힌 역사적 접근법을 공고히 할 뿐이라는 거지?!” 공연은 시대가 가로막았던 각 여성의 또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여섯 왕비의 한풀이는 가부장제와 신분 사회의 희생자들을 위한 흥겨운 위령제가 된다. 루시 모스 연출은 “공연 관람 후 관객들이 역사를 형성해온 가부장적 사고방식에 대항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공연은 다음 달 25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이어진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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