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 파괴 콘텐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겁에 질린 여성이 비명을 지르며 마구 도망친다. 그의 뒤를 쫓는 건 무시무시한 기운을 풍기는 살인 곰. 그가 기거하는 숲엔 실종자가 끊이질 않는다. 무참히 살육을 저지르고 친구마저 잡아먹으면서도 일말의 죄책감이 없다. 인간을 향한 분노가 만들어낸 괴물. 영화 ‘곰돌이 푸: 피와 꿀’(감독 리스 프레이크-워터필드)이 아기 곰 푸를 소비하는 방식이다.
지난달 개봉한 ‘곰돌이 푸: 피와 꿀’은 A. A. 밀른이 쓴 아동문학 ‘곰돌이 푸’ 저작권이 만료되자 이를 고어 장르로 바꿔 만든 영화다. 극에서 곰돌이 푸(크레이그 데이빗 다우젯)는 친구 크리스토퍼 로빈(니콜라이 레온)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인간을 미워하고 살생을 일삼는다. 스산한 광기가 감도는 그에게 익히 알고 있던 귀여운 아기 곰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개봉 이후 온라인 포털 사이트에 ‘곰돌이 푸’를 검색하면 영화 속 기괴한 실사 푸가 그간 봐온 낯익은 그림들과 함께 노출된다.
일각에서는 영화 개봉 전부터 곰돌이 푸를 좋아하는 어른 외에도 동화 주 소비층인 어린이가 해당 작품을 무분별하게 접할 가능성이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해당 영화가 성인용 콘텐츠로 기획돼 청소년 관람 불가로 분류받았으나, 온라인에 퍼진 이미지까지는 제재할 수 없어서다. 반면 영화 측은 ‘동심 파괴’를 홍보 문구로 내거는 등 이를 소구지점으로 삼았다. 국내 배포 보도자료에는 “원작의 스토리도 함께 가져와 충격을 선사”, “상상 이상으로 잔혹하고 화끈”, “피범벅 살인광 푸”라는 홍보 문구를 내세웠다.
어린이 콘텐츠는 이따금씩 어른 입맛에 맞춰 재생산된다. 몇 해 전 사회를 떠들썩하게 달군 ‘루피 논란’도 그렇다. 아동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에 등장하는 상냥한 비버 캐릭터 루피를 험상궂게 바꾼 이미지가 ‘밈’(온라인 유행 콘텐츠)으로 떠오르며 관련 논란이 잇따랐다. 유행에 힘입어 당시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출시됐던 루피는 비속어를 사용하고 특정 성별을 비하했다는 지적이 일자 약 3시간 만에 판매를 멈췄다. 이뿐만이 아니다. EBS 대표 어린이 콘텐츠 ‘딩동댕 유치원’을 확장해 어른 콘텐츠로 만든 유튜브 영상 ‘딩동댕 대학교’는 비속어가 여과 없이 등장한 게 문제가 됐다. 얼핏 보기에 어린이 콘텐츠와 유사해 어린이가 손쉽게 볼 수 있다는 비판이 더해졌다.
콘텐츠 범주가 다양화한 현재, 어린이를 위한 콘텐츠를 동심 파괴나 어른의 밈 명목으로 유희거리 삼는 게 타당한가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진다. 단순한 패러디일 뿐이라는 주장과 어린이 콘텐츠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의견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쿠키뉴스에 “좋게 이야기하면 원소스멀티유즈(OSMU·하나의 소재를 여러 용도로 활용하는 것)지만 사회적으로 문제점은 분명히 있다”면서 “원저작물을 소구하는 이들이 동의하지 못하는 창작물은 IP(지식재산권) 가치를 훼손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최근 영상콘텐츠가 지향하는 자극성은 성인 중심으로 맞춰져 이전 대비 수위가 높아진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어린이 콘텐츠를 만드는 창작자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입장에 서서 어린이 콘텐츠를 최대한 보호할 것을 주문했다. 어른과 어린이 콘텐츠를 분명하게 분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아동문학을 평론하는 김지은 서울예대 교수는 과거 미디어오늘과 나눈 인터뷰에서 “어른을 위한 세계는 넓고 많지만 어린이의 것은 그렇지 않아 어린이를 위한 영역을 불가피하게 두는 것인데, 어른들이 이를 가져가면 어린이들이 재밌고 편안하게 누릴 환경이 사라진다”고 꼬집었다.
유튜브 알고리즘 등으로 콘텐츠를 무분별하게 접근할 수 있는 건 문제다. 어린이가 어른용 콘텐츠를 접하기 쉬운 만큼 창작자는 제작 단계부터 콘텐츠가 미칠 파장을 고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 평론가는 “어린이 콘텐츠의 제작과 소비 주체는 모두 어른”이라면서 “어린이를 위한 것인지, 어른을 위한 것인지를 분명히 나눠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고 짚었다. 김 평론가는 “콘텐츠의 전적인 주도자는 창작자와 유통자만이 아니”라면서 “IP를 활용해 마음껏 자유롭게 만들겠다는 생각보다는 수평적인 시각에서 어린이 관점을 염두에 두고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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