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악을 녹이는 독
지난달엔 경남 통영에 갔었다. 멋있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 아기자기한 바다와 산책로,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의 자취, 거기에 국제 음악제까지 조화를 이뤄 4월 초의 통영 여행은 더할 나위 없었다. 음악당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카바코스와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연주에 귀를 기울였고, 강구안의 다찌집에선 각종 해산물에 술잔을 기울였다. 다음 날엔 산유골 수목원과 박경리 문학관에서도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불쑥불쑥 머릿속을 휘젓는 건 ‘악을 녹이는 독’이라는 문구다. 쓱 보고 지나친 것 같은데 잊히지 않는 구절, ‘붓 끝에/ 악을 녹이는 독이 있어야/ 그게 참여다’라는 박경리 문학관에서 읽은 시 ‘문필가’의 첫 부분이다. 매달 두 곳의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어서일까, 예술가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직업 때문일까. 곱씹게 되는 문장이었다. 악과 녹과 독이 만드는 운율이 혀끝에서 맴돌며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증폭시켰다. 악을 녹이는 독이란 어떤 걸까.
생각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사전을 검색해 봤다. 쉽고 익숙한 단어들이 하나씩 무대로 오르자 가볍지 않은 무게를 가진 주인공이 됐다. 붓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쓰는 도구’다. 악은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 나쁜 것’을 뜻한다. 독은 몇 가지 의미 중 ‘사납고 모진 기운이나 기색’을 말하는 것이겠지. 녹인다는 건 ‘얼음이나 얼음같이 매우 차가운 것을 열로 액체가 되게 하는 것’이고, 참여란 ‘어떤 일에 끼어들어 관계하는 것’이다.
박경리의 시는 예술가의 사회 ‘참여’를 당연한 전제로 한다. 작가나 화가가 붓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때 그 끝엔 세상의 나쁜 것들을 녹일 만큼 사납고 모진 기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예술가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다. 예술가는 이야기꾼 그 이상이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박경리는 1920년대에 태어나 아버지의 부재 속에 어렵게 자랐다. 결혼하고 5년도 되지 않아 6·25전쟁과 남편의 행방불명을 겪었고, 아들마저 사고로 먼저 보내야 했다. 어려서부터 읽고 쓰는 것으로 어려운 시간을 견뎌온 작가의 붓은 날카롭게 다듬어졌고, 개인의 아픔 속에만 머물지 않았다.
뉴스를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나쁜 일들이 넘쳐난다. 정치도 법도 악을 녹이지 못한다.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얼어붙고, 악은 더 큰 악을 불러온다. 얼마 전 화제가 됐던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주인공은 삶을 송두리째 바쳐 기어코 복수를 이뤄냈지만 가해자의 사과나 반성은 얻지 못했다. 넷플릭스 콘텐츠 ‘성난 사람들’은 분노와 앙갚음을 끊임없이 확장하며 주고받다가 함께 만신창이가 되는 사람들을 그린다. 두 이야기는 악을 녹이지 못한 복수는 통쾌함이 아니라 찜찜함을 남긴다는 걸 알려주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1898년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통해 간첩의 누명을 쓴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 편에 섰던 에밀 졸라가 떠오른다. 거대한 권력에 맞서 진실을 외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졸라의 용기와 날카로운 펜은 악을 녹이는 독이 됐다. 사르트르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 ‘참여’가 필요함을 알았다. 정치와 사회 문제에 시민들이 관여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당시 촉발된 프랑스 지식인들의 앙가주망은 후대의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도 글을 통해 풍자와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는 자신의 글쓰기에 역사적 진실 탐구와 정치적 목적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작가는 책상 위에서, 예술가는 작업실에서 혼자 작업을 한다. 그들은 붓을 가지고 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사회와 사람들을 향해 안테나를 세우고 ‘참여’할 수 있다. 그들의 붓 끝에 악을 녹이는 독이 있다면 우리가 더 좋은 세상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아직 나의 붓은 뭉툭하지만 언젠가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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