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이라는 옛 친구와의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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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시간은 너무 천천히 가고 하루는 몹시 길었습니다.
몽상과 현실을 오가는 습관이 형성되어서인지 학창 시절 집중력이 낮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매큐언이 들려주는 피터의 변신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몽상의 세계를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해낸 앤서니 브라운의 삽화는 상상과 현실 사이 혼종 공간을 경이로운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성공주의가 삶의 원리처럼 행세할수록 내 삶이 전형적이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응원도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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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시간은 너무 천천히 가고 하루는 몹시 길었습니다. 누나와 형이 학교에서 돌아오고 부모님이 퇴근하실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했습니다. 그럴 때 홀로 몽상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상상의 세계에 한동안 있다 현실로 돌아와 시계를 보고, 다시 상상에 빠져들기를 반복하면 형 누나 부모님이 차례로 집으로 왔습니다.
몽상과 현실을 오가는 습관이 형성되어서인지 학창 시절 집중력이 낮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수업을 듣다 숙제하다 책을 읽다가 딴생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사실 진득하게 책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삶을 바꿀만한 책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책장을 펴면 단어와 문장들이 이런저런 공상을 일으키는 만큼 독서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명한 분들이 자기 인생 책을 소개하는 것을 보면 부럽습니다. 고전을 읽어야 교양인이 된다는 덕담을 들으면 무교양인 제가 창피해집니다. 기본적인 독서량 없이 교수직을 수행하다 보니 강의와 글에는 죄책감과 수치심의 흔적이 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몇 년 전 우연히 초등학교 고학년을 위한 추천 도서 한 권을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고양이 얼굴을 한 소년이 그려진 표지에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그러고는 눈길이 제목과 저자로 옮겨졌습니다. 그 책은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의 1994년 작 ‘피터의 기묘한 몽상’이었습니다. 원서 제목은 멋지게도 ‘백일몽 꾸는 사람’을 뜻하는 ‘The Daydreamer’입니다. 인간성에 대한 진지한 분석으로 잘 알려진 부커상 수상자가 쓴 꿈 꾸는 소년의 이야기라니 그 자체로도 짜릿했습니다.
주인공 피터는 이름만큼이나 평범한 아이 같지만, 몽상 속에서는 결코 평범한 소년이 아닙니다. 책의 8개 장에는 피터가 상상을 통해 들어가는 8개의 다른 현실이 나옵니다. 각 장에서 피터는 고양이 갓난아기 어른 등으로 변신하며 익숙했던 세계를 새롭게 대하고 삶의 의미를 배워갑니다. 매큐언이 들려주는 피터의 변신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몽상의 세계를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해낸 앤서니 브라운의 삽화는 상상과 현실 사이 혼종 공간을 경이로운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이 책은 어느덧 어른이 된 저에게 그토록 지겨웠던 유년 시절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도와줬습니다. 피터처럼 몽상에 빠지곤 하던 어린 나를 기억하게 함으로써 지금도 쓸데없는 생각을 즐기는 제 모습을 긍정하게 해줬습니다. 현실이 팍팍할수록 우리에게 상상의 세계가 더 필요합니다. 성공주의가 삶의 원리처럼 행세할수록 내 삶이 전형적이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응원도 필요합니다. 그런 만큼 ‘피터의 기묘한 몽상’은 한 소년의 성장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속한 현실과 다른 법칙으로 움직이는 낯선 세상을 맛보게 하는 마법처럼 놀라운 책입니다.
김진혁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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