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언어·역사·종교 얽힌 동남아, 세계화의 선진 지역
국제적 위상 높아진 아세안
유엔 통계국 기준에는 아시아의 다섯 개 지역이 들어있다.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시아’라 할 수 있는 시베리아는 유럽국 러시아의 영역이다.)
동아시아-한자문명, 남아시아-힌두문명, 서아시아-이슬람문명, 중앙아시아-유목문화가 바로 떠오르는 데 비해 동남아시아의 역사-문화적 통합성은 일견 분명하지 않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많은 언어가 사용되고, 강력한 정치조직의 역사도 없고, 종교 분포도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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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나라 이후 중국인 이주 늘어나
화교 커지며 본토에도 세력 미쳐
16세기 유럽 진출하며 상업 발달
이슬람 수용 등 다양한 문화 일궈
국경 중심의 국가주의 세지 않아
EU에 비견할 지역연합으로 성장
」
중국의 확장, 바다로 이어지나
동남아시아(이하 ‘동남아’)는 중국(동아시아)과 인도(남아시아) 사이의 지역이다. 양쪽 모두 동남아보다 문명이 일찍 발달하고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그래서 ‘인도차이나’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고, 16세기 서양인의 진출 전에는 인도 및 중국과 접촉이 많았다.
10세기 이전의 중국이 동남아와 직접 마주친 것은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남월(南越·북베트남)뿐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교역을 원하는 세력이 조공 명목으로 보내는 공물이 쓸 만하면 받아들이는 일이 단속적으로 있었고, 중국 쪽에서는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현지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노력이 별로 없었다.
남송 때인 1225년에 나온 조여괄(趙汝适)의 『제번지(諸蕃志)』가 달라진 사정을 보여준다. 조여괄이 천주(泉州) 시박사(市舶司, 교역 감독 관서)를 담당하는 동안 모은 정보를 묶은 이 책에는 가까운 동남아는 물론, 이슬람세계 서쪽 끝 모로코에 관한 정보까지 들어있다. 중화제국이 대륙의 남해안까지 꽉꽉 채우고 바다로 넘쳐나가기 시작하는 모습이다.
원나라(1271~1368) 때는 교역의 꾸준한 증가에 몽골제국의 구조 문제가 겹쳐져 해상활동이 크게 확대되었다. 원나라는 서쪽의 일칸국과 밀접한 관계였는데 육로가 적대 세력의 위협을 받으면서 해로에 많이 의지하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도 원나라를 떠날 때 일칸국으로 공주를 시집 보내는 배를 탔다. 쿠빌라이 칸의 일본(1274, 1281)과 자바(1291) 정복 시도도 있었다.
쿠빌라이 칸 이후 원나라의 쇠퇴에 따라 국가사업으로서 해상활동의 발전은 막혔으나 민간 활동은 계속 확대된 사실을 15세기 초 정화(鄭和) 함대의 활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중화제국의 확장이 해양 방면으로 이어질지 여부가 결정되는 고비였다.
‘해적’ 이름으로 나타난 화교집단
정화 함대의 활동(1405~1433)은 동남아에 관한 많은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그중 흥미로운 것 하나가 제1차 항해(1405~1407)에 나타나는 수마트라섬 팔렘방(三佛齊)의 ‘해적’ 진조의(陳祖義)에 관한 것이다.
정화 함대가 나가는 길에 팔렘방에 들렀을 때는 진조의의 귀순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들어오는 길에 들렀을 때 그의 귀순이 거짓이라 판정해서 토벌하고, 그를 고발한 시진경(施進卿)을 선위사(宣慰使)에 임명했다. 시진경은 (그 아들딸까지) 현지에서 ‘왕(王)’ 노릇을 했다.
수백 척의 배로 넓은 해역을 누비면서 1만여 척 배를 덮쳤다느니, 토벌 때 5000명을 죽였다느니, 진조의에 관한 기록에는 믿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 실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상당수 중국인이 동남아 지역에 흘러나와 조직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광둥(廣東) 출신의 진조의나 항저우(杭州) 출신 시진경처럼 중국 남해안 출신이 많았다. 그리고 시진경이 무슬림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동남아의 이슬람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토착종교가 내륙에는 널리 자리 잡고 있고, 항구를 중심으로 해안지역에 이슬람교가 퍼지고 있었다. 정화가 팔렘방에 두 번째 들렀을 때는 이슬람화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지의 경쟁자 중 무슬림인 시진경을 밀어주는 쪽으로 마음을 바꾼 것 아닐까. (함대 간부 중에도 정화를 위시해서 무슬림이 많았다.)
‘중세’ 없이 ‘근대’ 맞은 동남아
15세기까지 동남아 지역의 수출품은 향료·광물·동식물 등 천연상품뿐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곳은 내륙의 강 유역 몇 곳에 불과했고 제조업도 빈약했다. 교역활동이 늘어나고 유럽인이 진출하면서 16세기에 항구도시들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규모가 작던 내륙의 농업지대도 해안의 상업지대에 식량 등 생필품을 공급하면서 생산력과 인구를 늘려나갔다.
확고한 중세적 체제가 자리 잡지 않은 상태에서 근대적 변화를 맞이했다는 점에서 동남아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럽 세력의 일방적 침략을 당한 아프리카와 달리 동남아에서는 여러 방면 문명 세력이 엇갈리면서 매우 복잡한 양상이 전개되었다.
동남아의 변화는 외부의 작용에 대한 강력한 반작용이 되기도 했다. 중국사를 공부해 온 내게 화교 사회의 성격과 역할이 들여다볼수록 흥미롭다. 근대중국의 진로에 영향을 끼친 존재로 서양에만 주목을 쏟아 왔지만 실제로는 남양(南洋)의 역할도 만만찮았다. 『임꺽정』의 홍명희(1888~1968)가 청년 시절의 몇 해를(1914~1917) 남양에서 지낸 데도 까닭이 있을 것이다.
중국인의 동남아 이주는 농업 방면과 상업 방면에서 이뤄졌다. 농민의 이주가 장기간에 걸쳐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된 반면 상인들의 이주는 송나라 이후 빠르게 늘어나 조직활동으로 나타났다. 정화 함대는 팔렘방 외에도 여러 곳에서 이런 집단들을 찾아내 활용하려 하였으나 그 후 명나라가 원양항해를 포기하면서 이들은 밀무역의 주체가 되었다.
유럽인의 식민지배가 행해진 곳에서는 화교가 준-지배계층이 되기도 했다. 동남아에는 유럽인의 이주가 극히 적었기 때문에 화교들이 기술 인력으로 활용되기도 했고, 우수한 조직력으로 상업과 제조업에서 유리한 조건을 누리기도 했다. 그 때문에 현지인과 유럽인 양쪽의 미움을 받는 일이 많아 종종 박해를 겪기도 했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통제력 약화에 따라 화교 사회의 역량이 본국에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 펼쳐졌다. 쑨원(孫文)의 민국혁명을 지원하고 개혁개방기 외자 유치에 호응하는 등 잘 알려진 일도 있지만, 명-청대에 중국, 특히 남중국의 사회와 경제에 끼친 영향은 앞으로 밝혀질 것이 많다.
서아시아·유럽 등에도 영향 미쳐
동아시아에서 바라보는 내게는 동남아의 변화가 중국에 끼친 영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남아시아, 서아시아, 유럽 등 다른 지역에도 그 영향이 적지 않았다. 근대라는 시대를 겪어내는 과정에서 여러 문명권의 흐름이 뒤얽혀 가장 다양한 현상을 빚어낸 현장이 동남아이기 때문이다.
세바스천 콘래드의 『글로벌 히스토리란 무엇인가?』(2016)를 읽고 있다. 콘래드는 ‘글로벌’의 의미가 연구의 대상(무엇을 바라보느냐?)보다 연구자의 시각(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있음을 역설한다. 종래의 ‘월드 히스토리’가 여러 지역 역사의 물리적 집합에 그친 것과 달리 ‘글로벌 히스토리’는 유기적 결합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월드 히스토리’와 ‘글로벌 히스토리’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까 잠깐 고민하다가 둘 다 ‘세계사’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다만 ‘세계’를 물리적 집합체로 보느냐, 유기적 결합체로 보느냐 하는 ‘세계관’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역사학자 김호동은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2010)에서 라시드 앗 딘의 『집사』를 ‘세계사’의 출발점으로 꼽았지만 ‘세계사’는 사마천과 헤로도토스를 비롯해 역사학의 탄생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버전이 한 차례 바뀐 것일 뿐이다.
지금 동남아 연구가 필요한 이유
근대는 국가주의의 시대였다. ‘세계화’의 첫 번째 의미는 국경의 힘이 줄어드는 데 있다. 동남아는 국경의 힘이 약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세계화의 선진 지역이었다. 아세안이 유럽연합 버금가는 중요한 지역연합으로 일어설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동남아 역사의 연구가 종래 부진했던 것은 국가주의 때문이다. 근대 역사학에는 국가를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고하고, 연구 수행에 국가의 지원이 중요하다. 21세기 들어 새로운 연구 성과가 활발하게 나오기 시작한 것은 국가주의의 힘이 빠지고 세계화의 의미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세계사’의 새 업그레이딩을 위해 동남아 역사 연구의 심화가 필요하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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