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당신의 인생에 꼭 피해야 할 것. 바로 나르시시스트다!

이마루 2023. 5. 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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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정지음 작가는 인간관계 문제로 두 번이나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을까?

나르시시스트는 최악이야

인간관계 문제로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재직 중인 회사의 사장, 한 번은 친구 때문이었다. 나는 이들의 괴롭힘으로 심각한 우울증과 알코올 의존을 겪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곤 기괴하고 고약한 성격뿐이었는데, 가까스로 해방된 후에도 오랫동안 그들의 영향력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억울하면서도 궁금했다. 나이도, 성별도, 성장 배경도 모두 다른 타인끼리 어떻게 성격 하나만 똑같을 수 있을까? 나는 왜 바보처럼 비슷한 유형의 악인에게 두 번이나 당한 것일까? 아니, 애초에 그들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기적이고, 거짓말을 잘하고, 뻔뻔하고, 공감능력이 하나도 없다는 설명을 주절주절 늘어놓곤 했다. 그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언제나 분노가 끓고 손발이 떨렸으므로 진실해 보였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들을 한 마디로 정의할 언어가 없었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차례차례 정신과에 보내면서 본인은 절대 가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명명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악마나 사탄이라 하기엔 그들의 교묘함은 인간적이었다. 미쳤다고 하기엔 그 모습이 오히려 임기응변에 강한 리더형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술자리에서 그들에 대해 장황한 하소연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내가 더 미친 사람 같아 보였고, 떨떠름한 주변인들의 반응에 지치기도 여러 번이었다.

비로소 그들의 정체를 찾은 것은 〈나르시시즘의 심리학〉이라는 책에서였다. 내 젊은 날을 크게 훼손하고 보상도 없이 사라진 그들은 고작 그리고 무려 ‘나르시시스트’였던 것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나르시시즘은 그리스 신화 속 나르키소스 설화에서 기원한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서 다루는 나르시시즘은 단순히 자기 미모에 매혹된 거울 왕자 개념이 아니다. 한 마디로 자기애지만 본질적으론 ‘자기애의 과잉으로 일그러진 인지 상태 전반’을 의미한다. 나르시시스트 주변인들이 반드시 괴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타인을 별개의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자신의 왜곡된 환상을 지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자신만 중요하고, 우월하며, 특별하기에 자신을 제외한 군중은 사소하고 열등하며 평범한 존재로 격하한다. 따라서 그들은 당당하다. 진짜로 ‘나에게만 자격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때로는 먼저 고개를 숙이고 겸손을 떠는 듯한 위장술을 쓰기도 하지만, 어딘가 공허하고 거짓된 태도라 금방 위화감이 느껴진다. 애석한 일이지만, 아무도 그들을 바꿀 수 없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 스승은 물론 본인조차 스스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대부분의 나르시시스트들이 나르시시즘에 오염되지 않은 기준과 관점을 가져본 적 자체가 없으므로.

책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생후 2~3년 동안 정상적 발달 과정의 하나로 나르시시즘 시기를 거친다고 한다. 세상에 오로지 자신뿐이라 엄마 또한 ‘나’로 감각되는 시기, 그래서 엄마가 자신을 품에서 떼어내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시기 말이다. 아기는 엄마와 자기가 완벽한 일체라는 환상이 깨질 때 최초의 수치심을 느끼는데, 이때 양육자가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정서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 시기의 양육자에게 적절한 관심과 사랑, 피드백을 받지 못한 아이는 유년기 나르시시즘에 고착되고, 사회로 나가 파멸적 행동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유아기를 떠나보내지 못한 어른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만난 악인들의 행동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들은 분명 나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인격적 결함이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 또한 부적절한 양육 환경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

이상하게도 이 모든 게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약간 위로가 됐다. 물론 이 책을 미리 읽었다 해도,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이 분야를 전공한다고 해도 이들을 피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나르시시스트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나르시시스트 성향을 관대하게 봐주며, 이를 ‘카리스마’의 일종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도 낭만적이다. 나르시시즘 대신 ‘타인 착취자’ 따위의 단어를 쓴다면 아무도 이 타이틀을 탐내지 않을 거다! 경험과 지식으로 나름 무장했다지만, 나 역시 세 번째 나르시시스트를 만나 고생하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그래도 알고 당하는 것과 모르고 당하는 것은 분명히 다를 것이라 생각하며,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안녕을 바란다.

정지음

싫은 것들을 사랑하려고 글을 쓰는 1992년생. 25세에 ADHD 진단을 받은 이후 첫 번째 에세이 〈젊은 ADHD의 슬픔〉으로 제8회 브런치 북 대상을 수상했고,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첫 소설 〈언러키 스타트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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