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부르는 아비 머리에 사격... 이 기막힌 한을 풀어주소서 [박만순의 기억전쟁2]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 학살현장에 선 최양호의 아들 최병묵 |
ⓒ 박만순 |
푸른 잔디 위에 깔린 한지는 하얗다 못해 눈이 시렸다. 한지 옆에 붉은 황토가 쌓이기 시작했다. "조카. 관이 보이네"라며 외친 작은아버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관이 나왔다고는 하지만 땅속에 30년간 묻혀 있던 관은 썩은 지 이미 오래였고, 관 쪼가리 일부만이 나왔을 뿐이었다. 썩은 나무와 흙을 헤집던 최병묵의 작은 아버지 최광호와 최선호는 동시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작은아버지 왜 그러세요?" 그들이 가르키는 손끝을 따라가 보니 두개골이 나타났다. 이윽고 최병묵은 작은아버지들이 엉덩방아를 찧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두개골에 직경 5cm의 구멍이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주여!" 크리스찬이었던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직면하고, 가슴이 먹먹했다. 나머지 유해는 그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구멍이 뻥 뚫린 두개골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물로 앞이 뿌예지면서 그때부터 사고의 기능이 정지됐다.
형님의 두개골과 유해를 한지로 감싼 최광호와 최선호, 그 뒤를 이어 서창리 뒷산을 내려오는 최병묵의 가슴은 뻥 뚫렸다. 조치원읍에서 화장을 한 유해는 충북과 충남의 경계에 있는 조천(鳥川)에 뿌려졌다. 30년 전 죽은 이의 묘를 파 화장한 가루를 조천에 뿌린 때는 고려대학교 조치원캠퍼스(현재의 세종캠퍼스)가 개교하기 1년 전인 1980년도였다.
기적초리에 총성이 묻혀
불청객을 맞이한 것은 컹컹 짖어대는 마을 개들이었다. 시절이 어수선하다 보니 누구도 방문을 열지 않았다. 단지 창호지 문에 끼운 작은 유리창을 통해 내다 볼 뿐이었다.
불청객의 발걸음은 사창리의 철공소 주인 최씨 집을 향했다. 불청객은 집주인을 부르는 절차를 모두 생략하고 구둣발로 문짝을 차며 "최양호 나왓!" 하며 순식간에 집주인을 연행했다. 네 살 소년 최병묵은 울음보를 터뜨렸고, 최양호의 아내 김창순(1926년생)은 넋이 나가 허둥대다 군인의 발목을 잡았다.
"이 X이"라며 불청객의 구둣발이 김창순의 배를 내질렀다.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아픔이었지만 자칫 남편이 '큰일 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번쩍 든 그녀는 배를 움켜쥐고 불청객의 뒤를 따랐다.
불청객의 발걸음은 조치원여중 뒤편의 강둑을 향했다. 도둑고양이처럼 불청객의 뒤를 따르던 김창순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뻔했다. 강둑에는 약 10명의 남정네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채 있었고, 이들을 감시하는 군인들의 매서운 눈매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사격 자세를 취한 군인의 손가락이 움직인 것과 사내들이 쓰러진 것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사내들의 쓰러지는 장면이 슬로우모션처럼 보인 것은 군인의 발포 소리가 마침 그때 충북선을 지나가는 기차의 기적소리에 묻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사내가 벌떡 일어나 "병묵아!"라고 외치며 몸부림을 쳤다. 급소를 피해 총격을 당한 최양호(1922년생)가 자신의 아들 이름을 부른 것이다. 군인은 최양호의 뒤통수를 정조준했다. 최양호의 몸이 붕 뜨더니 땅바닥에 떨어졌다. 남편의 뇌수가 흐르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아내 김창순의 숨은 멎을 것만 같았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자식 둘을 장티프스로 잃은 최양호가 아내와 독자 최병묵을 남기고 저세상으로 간 것은 1950년 9월 28일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조치원여중 뒤편 강둑에서였다.
동생들이 의용군에 갔다는 이유
최양호는 쇠스랑 열 개를 오토바이 뒷좌석에 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조치원 읍내에 있는 그의 철공소에서 농기구를 사는 이들은 대부분 장날을 이용했다. 하지만 조치원 외곽이나 충북 청원군 강외면에는 농기구를 일부 배달해 주기도 했다. 본격적인 경작을 앞두고 최양호는 강외면 심중리에 쇠스랑 열 개를 주문받아 배달해 주려는 참이었다.
조치원역이 소재한 조치원읍은 단순히 시골의 한 읍에 그치지 않았다. 1905년 경부선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한 조치원역은 1921년 조치원~청주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서울-대전-청주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성장했다. 더군다나 조치원은 1931년 읍으로 승격했다.
최양호는 바로 이런 곳에서 철공소를 차려 성실히 일했다. 6.25 전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으니 남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였다. 이랬던 그에게 불행의 여신이 다가선 것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였다.
"제부. 안즉 동생들 연락이 없지요?"
"네."
"..."
충북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에 사는 최양호의 처형 김영순은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 미안스러웠다.
제부의 동생 두 명이 의용군에 끌려간 지 두 달 가까이 됐는데도 깜깜무소식이라 제부 집안은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제부는 태성리에 자주 발걸음을 했다. 심장마비로 일찍 죽어 혼자가 된 처형과 조카 성일(1944년생)이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이모부, 이 건빵은 어디서 나셨어요?"
"미군한테 얻은 거다."
성일이가 묻고 최양호가 답했다. 추석날인 어제(1950년 9월 26일) 연합군 선발대가 조치원에 입성했다는 소문은 꼬마 성일이의 귀에도 도착했다.
▲ 조치원여중 뒤 강둑의 학살지 |
ⓒ 포털지도 화면 갈무리 |
아들 낳아주면 논 여섯 마지기 줄게
"누나. 병묵이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나랑 같이 지내요."
공주군 탄천지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남동생이 김창순에게 간곡히 권유했다. 김창순은 조치원에 남아 있다가는 '빨갱이 가족'이라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붙어 다닐 것 같아 동생의 말에 응했다.
탄천에서 친정엄마를 모시면서 구멍가게를 운영했다. 전쟁이 끝나고 소년 최병묵이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중매쟁이가 탄천 구멍가게를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병묵이 엄마. 긍께 아들만 낳아주면 병묵이 대학교까지 보내주고, 논도 여섯 마지기나 준다니께." "그게 사실 여유?"
전북 익산에 사는 갑부(?)가 중매쟁이를 통해 후처를 얻으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갑부는 딸만 넷인 딸부잣집이었다. 그래서 대를 이을 사내만 낳아주면 후처에게 사례를 하겠다는 작정이었다.
김창순은 논보다는 자신의 유일한 자식인 병묵이를 대학교까지 보내겠다는 욕심으로 재가를 결정했다. 소년 최병묵도 엄마를 따라 전북 익산군 낭산면 호암리로 갔다.
하지만 그곳은 등 따시고 배 부르게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엄마 김창순이 새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내리 딸만 넷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전처 자식까지 하면 딸만 8명인 셈이었다. 그 집에서 엄마도 눈칫밥을 먹었지만 최병묵도 먹은 밥이 소화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북 익산군 함열중학교를 졸업한 최병묵은 가시방석을 걷어치우고 이모가 살고 있는 충북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로 왔다. 이모와 이종사촌 형 이성일(1944년생)이 따듯하게 맞아 주었다.
성경학교에서 신학대학까지
소년 최병묵은 청주제일교회에서 운영하는 성경학교에 입학했다. 숙식은 태성리 이모 집에서 해결했다. 사실 육군사관학교에 가는 것이 꿈이었지만 경제적 형편은 고사하고 연좌제 때문에 그 꿈은 언감생심이었다. 그가 신학의 길에 몸담은 것은 신원조회의 탈출구로 종교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2년제 성경학교를 다니면서 그는 청원군 낭성면 무성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했다. 낭성에서 청주제일교회 까지는 20리(8km) 길이었는데, 산속 길을 매일 걸어 다녔다.
그는 목사가 되기 위해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4년제인 대구한남신학교에 이어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주일은 청원 낭성 무성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주중에는 서울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런 독실한 크리스찬에게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원도 철원에서 군대 생활할 때였다. 대대 서무병이었던 그는 끝내 비밀취급 인가를 받지 못했다. 남이야 '그게 뭐 대수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빨갱이 가족'이라는 문신이 몸에 새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도 그랬지만 연좌제-신원조회라는 주홍글씨는 그를 더욱 신앙생활에 몰두하게 했다. 한국신학대학을 나와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충북 청원군 외평교회에 부임했다. 그때로부터 만 70세에 청주시 문의면 등동교회에서 정년을 맞이했다. 전도사 생활부터 계산하면 51년 동안 목회 활동을 한 셈이다.
▲ 이모부 최양호의 죽음을 증언하는 이성일 |
ⓒ 박만순 |
신청 기간 끝나
CBS 노조위원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필자를 당혹하게 했다. 지인의 아버님이 한국전쟁기에 학살된 이의 유족이라며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접수 기간이 끝난 지는 한참 전이었다. 형식상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70여 년간 한(恨)을 안고 살아온 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자체가 해원의 길이자 심리치료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최병묵의 아버지 최양호의 사연을 듣고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를 들추었다. 당시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음은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의 관련 보고서 내용이다.
"조치원읍 서창리에 살던 강희규가 1950년 9월 28일 조치원여중 부근에서 부역혐의로 대한민국 국군에게 총살됐다. 희생당한 같은 마을 사람은 안충열, 최양호, 장태식 등이다. 강희규는 인민군 점령기에 민청위원장직을 맡았고 장태식은 자위대장을 했다. 마을에서 군인들이 부역혐의자들을 색출한 뒤 바로 조치원여자중학교 뒤 강변 둑에서 집단 총살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문에 최양호라는 이름이 나왔다. 당시 최양호의 유족으로는 최병묵이 유일했는데, 그는 목회 활동으로 신고 자체를 몰랐다.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 신청 기간에도 과거사법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미신청사건으로 조사가 되기는 했지만 진실규명 확인 결정을 받지는 못했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동생들이 의용군에 끌려갔다는 이유만으로 합법적인 절차 없이 학살된 최양호의 죽음은 역사에 묻히고 마는 것인가? 그가 명예회복 될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한 것인가? 제2, 제3의 최양호와 같은 케이스를 구제할 방법을 정부와 국회가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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