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탄신 기념일에 다녀온 곳
[오문수 기자]
▲ 뇌헌스님에 관한 기록이 적혀있는 흥국사사적비 주위에서 조고선유적답사단 안동립 단장의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 |
ⓒ 오문수 |
오전 11시, 회원들이 탐방을 떠나기 위해 모인 곳은 여천역이다. 서울과 부산, 충남 아산 목포 등 전국 각지에서 온 회원들이 열차나 고속버스를 이용해 모이기 쉬운 곳이기 때문이다.
회원들의 첫 방문지는 여수 흥국사다. 왜란 당시 의승수군 주둔지였던 흥국사는 '이 절이 잘 되면 나라가 잘 되고, 나라가 잘 되면 이 절도 잘 될 것이다'라고 하여 국가와 절이 공동운명체 임을 강조하는 절이다.
고조선유적 답사회원들이 특별히 흥국사를 방문한 이유가 있다.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며 일본으로 간 안용복의 2차 도일(1696년, 숙종22) 당시 울릉도·독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했던 뇌헌 스님이 계셨던 곳이기 때문이다.
▲ 이순신 모친이 기거했던 자당기거지에서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일행들 |
ⓒ 오문수 |
고조선유적 답사단 안동립 단장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찰이다. 뇌헌 스님에 관한 사료에 오류가 있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안동립 단장이 발견한 사료 오류는 3가지로 뇌헌 스님이 여수 흥국사 출신이 아닌 순천 송광사 출신으로 기재되어 있다.
또한 뇌헌스님의 이름도 '뇌헌(雷憲)'이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흥국사 대웅전과 흥국사 사적비에 뇌헌(雷軒)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흥국사에 대한 명칭도 흥국사(興国寺)가 아닌 흥왕사(興旺寺)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윤동주 유고집을 보관해 빛을 보게 한 정병욱 가옥
일행의 다음 방문지는 광양 망덕포구에 있는 정병욱 가옥이다. 이 가옥은 정병욱의 모친이 윤동주 유고집을 보관해 윤동주 시가 빛을 보게 만든 집이다.
▲ 윤동주 유고집을 보관했던 정병욱가옥을 방문한 일행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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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가 정병욱에게 원고를 넘긴 때는 1941년 11월 20일 이후부터 1942년 2월로, 일본 유학 가려던 사이로 추정된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윤동주는 시집 세 권을 만들었다. 한 부는 당시 자선시집을 만들어 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던 계획을 "지금은 위험하다"며 말린 스승 이양하 교수에게, 한 부는 자신이 가지고 일본으로 가지고 갔고, 나머지 한 부는 정병욱에게 맡긴다.
1943년 여름 일본에서 윤동주는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돼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고 같은 해 정병욱도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됐다. 정병욱은 이 원고를 모친께 맡기며 '저나 윤동주 시인이 살아서 돌아올 때까지 소중하게 간직해 주십시오'라고 부탁드렸다.
'그리고 둘 다 살아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조국이 독립되면 이 원고를 연희전문학교로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 달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떠났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살아 돌아온 정병욱은 자신의 집 마루 아래 숨겨뒀던 윤동주의 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발간(1948년, 정음사)해 윤동주를 세상에 알렸다.
한반도가 위기에 처할 때 마다 나라를 구한 관음포 앞바다
▲ 남해 이순신순국공원에 있는 이락사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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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이순신장군이 돌아가셨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 '이락사'를 둘러보고 팔만대장경 판각 기념관과 정지장군 승전기념물을 둘러본 후 묘도봉화대를 향해 차를 돌렸다.
▲ 정유재란이 끝나갈 무렵 광양만 중심에 있는 묘도는 전략요충지였다. 광양만을 빠져 나가 일본으로 되돌아가기를 고대하는 왜수군과 이를 막으려는 조명연합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운명의 순간인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간에 걸친 전쟁이 끝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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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묘도봉화대 인근에 세워진 안내문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듣고 있는 일행들 모습. 뒤쪽에 정유재란 당시 전황을 전하기 위해 가장 긴박했을 묘도봉화대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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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정유 두 왜란, 특히 7년간의 왜란이 종식될 무렵에 벌어졌던 조·명연합군과 순천왜교성에 갇혀 탈출을 꿈꾸던 왜군과 혈전이 벌어졌던 전장의 중심에는 묘도가 있었다.
▲ 순천왜교성에서 기념촬영한 일행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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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심재수씨의 도움을 받아 묘도 봉화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며 묘도가 전략요충지라는 걸 실감했다. 정유재란 당시 묘도에서 광양쪽을 향한 바다는 명나라 진린도독이 지켰고 묘도에서 여수쪽을 향한 바다는 이순신함대가 길목을 가로막았다.
▲ 화장동에 있는 고인돌 공원에 그려진 암각화 모습으로 돌칼 1점, 앉아있는 인물상과 서있는 인물상이 보인다. 역사 문화에 관심이 많은 고조선유적답사단원의 관심사항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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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유적답사단은 관광여행하기 위해 모인 단체가 아니다. 사전 논의를 거쳐 자료를 검토한 후 목적지를 결정한다. 때문에 현장에 도착하면 여기저기를 둘러보느라 시간이 지체되기 일쑤다.
때문에 첫날 예정했던 목적지를 돌아보지 못한 일행은 다음날인 29일 전라좌수영과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던 진남관과 타루비 대첩비각을 둘러봤다. 이어진 방문지는 여순사건 시발지인 14연대 자리와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최후 결전을 다짐하며 팠던 지하동굴을 살펴본 후 고흥으로 향했다.
이순신의 발포만호 부임은 이순신으로 하여금 나라를 구하라는 하늘의 뜻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한 달여가 지난 1592년 5월 4일 여수를 떠나 경상도로 향한 전라좌수영 수군은 5관 5포 출신 수군들이다. 5관은 여수·순천·광양·고흥·보성을 말하며 5포는 방답진·여도진·사도진·발포진·녹도진을 뜻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도 공부 열기로 가득한 일행은 사도진을 거쳐 이순신장군이 처음으로 수군 장수가 된 발포진에 도착했다. 이순신의 발포만호 부임은 이순신으로 하여금 조선을 구하라는 하늘의 뜻이다.
32살의 늦은 나이에 무과에 합격해 54살 때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 23년간 벼슬살이를 한 이순신은 15년간 북쪽과 남쪽의 변방을 전전하면서 하급 관리 생활만을 계속했다. 그의 성격이 너무 강직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로는 파직당하기도 하고 사병으로 강등되어 백의종군 하는 고난을 겪기도 했다.
▲ 고흥 발포에 있는 발포역사전시체험관에 있는 전시물로 전라좌수영 수군에 속했던 5관5포에 관한 설명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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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벼슬길에 올라 처음으로 일선 지휘관 생활을 하였다. 그동안은 지휘관을 보좌하는 역할에 머물렀지만 발포만호로 부임하면서 한 개의 진을 지휘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마지막으로 전라좌수영과의 인연이다. 이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의 5관 5포의 절반이 넘는 1관과 4포의 진이 존재한 고흥에 부임해 바닷길, 인맥, 지역 실상을 파악하는 데 더없이 소중한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여행을 마친 후 일행과 함께 동행했던 한국해양대학교 김낙현(영문학박사)가 소감문을 보내왔다.
▲ 국내 유일범선인 코리아나호에서 필자가 쓴 <텡게르가 손짓하는 몽골> 출판기념회를 하는 장면으로 일행들이 격려해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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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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