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전국청년위원장과 청년위원회 대표단 14명은 2일 오전 독도에서 대일 굴욕외교를 비판하고 우리 땅 독도를 지키겠다는 다짐을 가졌다. |
ⓒ 김기현 |
7일 열릴 한일정상회담을 앞두고 양국 정부가 회담 개최 사실을 발표한 날이었다. 이런 날에도 일본 정부는 독도를 언급하며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날 일본 외무성은 후나코시 다케히로 아시아대양주국장을 통해 김용길 주일한국대사관 차석공사에게 항의의 뜻을 전하고, 구마가이 나오키 주한일본대사관 차석공사(총괄공사)를 통해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에게 항의의 뜻을 전했다.
2일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 보도 발표에 따르면, 후나코시 국장과 구마가이 공사는 "다케시마가 역사적 사실에 비춰봐도, 또한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히 일본 고유의 영토인 점을 감안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극히 유감"이라며 항의했다.
대외침략과 관련된 국가적 욕망을 가장 잘 대변하고 이를 다음 세대에 가장 잘 전승하는 집단이 극우세력이다. 일본의 독도 침략에서는 흑룡회라는 극우단체가 그런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1901년 3월호 기관지 <회보>에서 독도를 앙코섬으로 표기하면서 이곳을 주인 없는 섬으로 선전했다. 이런 활약은 1905년 2월 22일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일본의 활동 영역을 한반도·만주·몽골·시베리아로까지 확장하는 대아시아주의를 표방한 흑룡회는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이후에 한국 지배를 위한 비밀 정보활동에도 가세했다. 한국통감부 촉탁 신분으로 이토 히로부미 한국통감의 막료 역할을 한 우치다 료헤이도 이 단체 간부였다. 독도에 대한 욕망이 지금의 일본인들에게도 강하게 전해진 데는 이들의 역할이 컸다.
1894년에 청일전쟁과 동학혁명 진압에 나선 일본은 여기서 거둔 승리를 발판으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배가했다. 이를 토대로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1905년에 늑약을 관철시킨 데 이어 1910년에 한국 강점을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배어 나온 것이 독도에 대한 욕망이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독도 강점부터 마무리했다. 유사시 일본군의 대한제국 주둔을 허용하는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1904년 2월 23일로부터 딱 하루 부족한 1905년 2월 22일 독도를 강점했다. 이 상태에서 을사늑약을 강제하고 뒤이어 외교권·군사권·경찰권 등을 연쇄적으로 접수하다가 1910년 8월 29일 식민지 한국을 얻게 됐다.
▲ 1962년 10월 20일 회담 중인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무대신 |
ⓒ 연합뉴스 |
한국에 접근할 때 독도 영유권을 탐내는 일본의 모습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통칭 한일협정) 체결 과정에서도 표출됐다. 김종필의 독도 폭파설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대신이 대일 청구권자금 혹은 대한 경제협력자금에 관한 밀약을 협의하는 자리에서 독도 영유권이 거론된 것도 일본의 욕망을 반영한다.
독도 폭파설에 관한 당시 언론 보도와 김종필의 해명은 다르다. 그해 12월 4일 자 <경향신문>에 인용된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르면, 김종필은 오히라 외무대신과의 회담에서 독도 영유권이 논란이 되자 "우리 해군을 시켜 독도를 폭파해버리겠다"라고 발언했다.
<김종필 증언록> 제1권은 다른 설명을 내놓는다. 오히라 대신이 회담 말미에 갑자기 "독도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며 "일본과 한국 사이에 자꾸 문제가 된다면 이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용의가 있다"라고 말했다. 김종필이 설명하는 그 직후 상황은 이렇다.
"나는 '그 문제는 오늘 회담의 의제가 아니지 않느냐'고 말을 잘랐다. 그가 같은 말을 반복하길래 '마음대로 해라. 우리는 결코 국제사법재판소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관련 당사국이 응소(소송에 응함)하지 않으면 재판을 진행할 수 없게 돼 있다. 나는 '당신들이 무슨 소리를 떠들고 난리를 쳐도 독도는 우리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독도를 폭파하면 했지 당신들한테는 줄 수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러고 회담은 마무리됐다."
김종필이 "우리 해군을 시켜 독도를 폭파해버리겠다"라고 말했는지, 아니면 "독도를 폭파하면 했지 당신들한테는 줄 수 없다"라고 말했는지를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야기를 먼저 꺼낸 쪽이 오히라로 보인다는 점이다. 국교정상화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독도 영유권이 거론되는 이 같은 모습은, 일본이 한국에 접근할 때 독도 침탈도 함께 추진한 20세기 초반의 일을 떠올리게 만든다.
한일협정 당시 한국 국민들은 김종필과 오히라가 청구권 자금에 관한 밀약을 체결한 사실을 전해 들은 뒤 독도 영유권에 대해서도 우려를 갖게 됐다. 1965년 3월 20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일 굴욕외교 성토 강연회'에서는 '박 정권이 독도를 팔아먹고 있다'는 주장도 쏟아져 나왔다.
이에 대해 박 정권은 터무니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2006년 6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언론 인터뷰에서 한일협정 5개월 전인 1965년 1월에 독도밀약이 체결된 일을 공개했다.
2010년에 <일본문화학보> 제47집에 수록된 최장근 대구대 교수의 논문 '현 일본 정부의 죽도문제 본질에 대한 오해-독도밀약설과 한일협정 비준 국회의 논점을 중심으로'는 일본 국회의사록이나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독도밀약의 존재를 학술적으로 증명했다. 무엇보다 1965년 이후 한일 두 정부가 보여준 모습이 독도밀약과 거의 일치한다.
독도밀약에는 "독도는 앞으로 한일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라는 조항이 담겼다. "한국이 점거한 현 상태를 유지"하되 일본도 자국 영토로 주장하는 것을 한국 정부가 용인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일본 정부가 주기적으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망언을 계속하는데도 한국 정부가 형식적 항의만 하고 그치는 일이 매번 되풀이된 일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독도밀약은 일본 내각이 한국 정부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 지난 3월 16일 일본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일 확대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두 사례 다 한국에 불리한 결과를 낳았다. 결과만 불리했던 게 아니다. 그 과정에서 독도의 운명까지 불리하게 됐다. 경술국치 5년 전에는 독도가 대한제국 본토보다 먼저 강점됐다. 한일협정 5개월 전에는 독도밀약이 한일기본조약보다 먼저 체결돼 한국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묵인하는 일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사례들은 양국이 또다시 급속도로 긴밀해지는 윤석열 정권하에서 독도가 정말 괜찮겠는지를 염려하게 만든다. 윤 정권은 일본군과의 연합군사훈련을 독도 인근에서 서슴없이 거행한다. 일본인들이 1905년 독도 강점을 기념하는 날인 지난 2월 22일 다케시마의 날에는 하필이면 독도 인근에서 일본군과 연합군사훈련을 벌였다. 제주 4·3사건(4·3항쟁)의 아픈 상처를 생각나게 하는 날인 지난 4월 3일에는 하필이면 제주 남방 해역에서 일본군과 연합훈련을 벌였다.
윤 정권은 독도 방어훈련인 동해영토 수호훈련도 축소시켰다. 이를 두고 지난 2월 22일 자 <산케이뉴스> '다케시마의 날에 한국 외교부가 공사 불러 항의'는 이를 윤 정권의 "대일 배려"로 평가했다.
일본이 한국에 접근할 때는 독도에 대한 욕망도 함께 드러냈다는 점, 윤석열 정권의 독도 수호 의지가 역대 정권들보다 현저히 약하다는 점은 독도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는 7일 한일정상회담은 윤석열 정권과 기시다 후미오 정권한테는 경사 중의 경사다. 그런 경사가 임박한 시점에도 기시다 내각은 독도에 대한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한국의 독도 지배에 대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극히 유감"이라고 항의했다. 윤 정권의 굴욕외교가 독도마저 불행하게 할 가능성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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