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들의 마음 속 괴물의 외침을 들어라
[안정인 기자]
▲ 댄스 네이션 무대 댄스 네이션 무대 |
ⓒ 안정인 |
무대와 관객석은 하나의 돔처럼 이어져 있다. 두꺼운 부직포를 몇 겹으로 연결해 깊숙한 동굴이나 신체의 내부, 현실과는 동떨어진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무대 정면의 조각들은 자막을 띄우는 스크린으로도 사용되고, 나머지 조각들은 조명과 어우러져 극의 분위기를 조절한다.
클레어 배런(Clare Barron)이 2018년에 발표한 이 작품에는 십 대 초반인 7명의 댄서가 출연한다. 14~15살 무렵의 소녀 6명과 1명의 소년이다. 그들 중 하나인 주주는 암에 걸린 엄마를 위해 댄서가 되기로 결심한 소녀다. 문제는 단짝 아미나가 자신보다 더 춤을 잘 춘다는 점이다. 댄스 선생님인 펫은 전국대회 우승을 위해 인도의 '간디'를 모티프로 한 새로운 안무를 구상한다. 가장 중요한 배역인 '간디의 영혼'을 따내기 위해 경쟁하는 아이들.
여기까지는 10대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나 이야기의 단골 구조다. 이 10대가 치어리더라면 <브링 잇 온(Bring it on)>이 되는 것이고, 드럼을 친다면 <위플래쉬(Whiplash)>가 되고, 밴드를 한다면 <싱 스트리트(Sing Street)>가 될 것이다. '별 볼일 없던 10대가 각성하여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결말은 너무 뻔하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시작되겠군, 하는 찰나에 이 연극은 살짝 몸을 비튼다. 조금 방향을 틀었을 뿐인데 아주 다른 결론에 도착한다.
당신이 20대이건 70대이건 상관없이 10대보다 나이 먹은 사람들은 모두 이 아이들이 거쳤을 법한 과정을 지나갔다. 그때의 당신이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혹시 기억하는가? 14살의 아이에게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선생님인 펫은 댄스 대회 무대에 대한 권력을 쥐고 있다. 모두가 원하는 주연 역할이지만 지명하는 사람은 펫 선생님이다. 아이의 기를 꺾지만 말고 재능을 칭찬하며 잘 지도해 달라고 애원하는 주주 엄마의 요청을 펫은 단호하게 묵살한다. <위플래쉬> 속 폭군 '플레쳐 교수'의 재림이다. 주주에게 소리를 지르고 폭력적인 말을 쏟아낸다.
주연으로 뽑힌 주주는 이제 최고의 친구였던 아미나가 거북하다. 어쨌든 아미나보다는 잘하고 싶다. 아미나의 마음도 편하지 않다. 왜 자신이 아니고 주주일까. 아미나 역시 자신이 주주보다 춤을 잘 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주주가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내가 선생님에게 뭘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먼저 든다.
다른 아이들의 마음도 단순하지는 않다. 무대에서 뜻밖의 모습을 보여준 아미나를 싫어하고 불편해하면서도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런 친구들의 기분을 맞추며 성공을 향해 달릴 수는 없다. 성공을 위해서는 혼자, 외롭게 가야 하는 것임을 아미나는 직감한다. 대부분의 어른이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얻는 깨달음을 14살의 아미나가 체득하는 중이다.
모두 이런 식의 성공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주주를 짝사랑 중인 루크의 꿈은 소박하다. 비 내리는 밤 차를 타고 엄마와 즐거운 이야기를 하며 달리는 것이다. 모든 꿈이 거창할 필요는 없다. 애슐리는 완벽한 자기애를 드러낸다. 뛰어난 외모와 성적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지만 입 밖으로 낼 엄두는 내지 못한다. 귀여운 녀석들. 어디선가 만날 법한 모습들이다.
이 아이들이 24시간 춤만 추는 것은 아니다. 14살 아이들의 몸은 성인으로 자라고 있고, 호르몬의 농간이 시작된다. 가족처럼 단순하기만 했던 집단은 학교나 친구들처럼 복잡한 관계로 발전한다.
▲ 댄스네이션 무대인사 |
ⓒ 안정인 |
몸에 딱 붙는 댄스복과 타이즈를 입고 평소라면 듣기 힘든 섹스에 관한 말을 내뱉는 아이들의 모습이 자칫 섹슈얼한 모습으로 소비될 것 같다는 기우는 하지 않아도 된다. 14살 댄서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하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섞인 배우들이 10대들의 언어를 내뱉는다. 관객이 몇 살이든 과거 스스로의 감정을 돌아볼 수 있겠느냐는 물음 같다.
몸이 불편한 배우도 2명 출연한다. 주주 엄마역의 강보람 배우와 루크역의 백우람 배우다. 두 배우 모두 발음이 조금 다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두 배역 모두 꽤 긴 대사를 소화하고 있어서 관객인 나는 틈틈이 베이어프리로 제공되는 자막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이 배우들의 감정 전달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싸늘한 선생님을 붙들고 주주를 부탁하는 엄마의 대사를 듣다 눈물이 날 뻔했다. 발칙하고 밝고 발랄한 이 연극 전체에서 가장 코가 시큰하는 장면이었다. 두 배우에게 박수를 보낸다.
코니 역의 이미라 배우 덕분에 120분 공연 내내 웃음이 터졌다. 의외의 킬링 포인트가 있는 배우다. 이 연극에는 노래 한 편이 사용된다. 모두 함께 이 노래를 합창한다. 관객석에서 박수를 치며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다. 어떤 가사와 내용이 담긴 노래인지 기대해도 좋다.
페트 역의 마두영 배우는 좀 더 악독해져도 좋을 것 같다. 주주를 다그치는 것에도 주주 엄마에게 냉정하게 대답할 때도 10프로 부족하다. 더 잔인하게 아이들을 못살게 굴어 주세요.
작은 무대라 단순하게 무대 연출을 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조금 더 화려하고 거대한 세트가 있었다면 관객 입장에서는 신이 났을 것 같다. 이 연극이 좀 더 큰 무대에서 공연되기를 기대한다.
결론처럼 말하자면 이 연극은 편하지 않다. 성적인 이야기가 난무하는 것이 귀에 거슬릴 수도 있고 배우들의 발음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10대들이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마음 깊은 곳에서 짜증이 솟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 10대를 지나온 우리 모두는 비슷한 감정을 혼자 간직한 채 어른이 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이 아이들이 당당하게 입 밖에 냈을 뿐이다. 지금껏 베이어프리 자막이 청각에 장애가 있는 분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 나의 오만에 반성했다. 덕분에 도움 많이 됐습니다. 오늘도 그곳을 찾는 모든 분들이 흥과 즐거움을 느끼기 바란다. 이 공연은 5월 20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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