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렬의 시시각각] 삼성과 SK하이닉스는 누가 지키나
우리 기업 불이익 받는 일 없도록
한ㆍ미 간 반도체 현안 조율 필요
중국이 미국 기업 마이크론의 반도체 판매를 금지할 경우 중국 내 반도체 부족분을 삼성과 SK하이닉스가 메우지 말도록 미국이 한국에 요청했다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가 있었다. 이는 한국과 한국 기업이 언제든 미·중 패권 경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정부는 FT 보도를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한국 기업의 참전을 요구하는 미국 의도는 명확해 보인다. 중국이 자국 기업(마이크론)을 공격하면서 내상은 피해 갈 가능성을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어쩌면 미국이 가장 바라는 것은 이 구상을 알게 된 중국이 마이크론 제재를 포기하는 것인지 모른다. 전투로 치자면 피 흘리지 않고 고지를 지키는 것이다.
1978년 창립된 마이크론은 80년대 미·일 반도체 전쟁 등 산전수전을 겪고 살아남은 승부사다. 중국은 마이크론에 중요한 시장이다. 지난해 매출의 4분의 1가량을 중국 본토와 홍콩에서 거뒀다. 일각에선 마이크론이 이번 작전 수립에 상당한 역할을 했으리라고 본다. 마이크론으로선 삼성과 하이닉스에 의존하려는 중국의 계획을 꺾어 제재를 피하게 되면 최선이다. 제재를 당하더라도 라이벌인 삼성과 SK하이닉스에 중국 시장 지분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차선이다. 중국이 마이크론을 어떻게 다룰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하지만 삼성과 SK하이닉스의 중국 판매 확대를 난감하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이크론의 노림수는 일단 먹혀든 셈이다.
반도체를 기술 패권과 경제 안보의 핵심 병기로 여기는 미국은 자국 반도체산업 보호에 철저하다. 미국 반도체업계는 곤경에 처할 때마다 ‘미국의 국익’을 전면에 앞세워 정부 지원을 끌어냈다. 80년대 값싸고 품질 좋은 일본 반도체를 시장에서 밀어낸 미국의 통상 보복도 실리콘밸리 반도체 업체들의 사활을 건 워싱턴 로비에서 시작됐다. 약 520억 달러의 지원금이 걸린 지금의 미국 반도체지원법(CHIPS and Science Act) 입법도 반도체 거물 인텔을 비롯한 미 반도체업계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
‘반도체 동맹’인 한·미 사이엔 기밀 정보 제출, 중국 내 반도체 생산 제한 등 보조금 독소 조항과 대중(對中) 반도체장비 수출 통제 등 현안이 많다. 여기에 FT가 보도한 삼성과 SK하이닉스 동원 계획까지 얹어졌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방문은 시원한 해법을 도출하지 못했다.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요즘 최악의 실적 부진을 겪고 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은 1분기에 4조6000억원대 영업적자를 냈다. SK하이닉스도 같은 기간 3조4000억원대 적자를 기록했다. 실적은 경기 사이클이 회복되면 호전된다. 문제는 한국 메모리 반도체의 절대적 우위 지속 여부다. 한국의 기술 초격차는 좁혀지고 있고, 미·중 정면 충돌은 한국 기업의 활동 공간을 축소하고 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삼성은 인텔과 같은 자기만족을 경계해야 한다’는 기사에서 “삼성은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에 D램 및 낸드플래시 제조 기술의 혁신적 우위를 일정 부분 잃어버렸다”고 진단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지난 40년간 여러 차례 고비를 넘어 왔다. 그러나 지금처럼 열강의 패권 경쟁 한복판으로 빨려들어간 적은 없었다. 1980년대 후반 한국 반도체의 부상을 지원한 미국 기업들은 ‘적(일본)의 적(한국)은 친구’라는 논리를 내세웠다(크리스 밀러 터프츠대 교수, 『반도체 전쟁(CHIP WAR)』). 그런데 이젠 미국이 적(중국)을 누르기 위해 친구(한국) 압박을 불사하는 시대가 됐다. 무임승차가 허용되지 않는 게 동맹이다. 미국은 이미 일본과 네덜란드 반도체장비 업체를 대중 수출 통제 전선에 동참시켰다. 동맹의 청구서는 앞으로도 날아올 것이다. 미국은 벌써 정부와 기업이 한몸처럼 반도체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삼성과 SK하이닉스를 비롯한 우리 기업의 실리를 지키는 국가 전략이 절실하다.
이상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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