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늙다리 미치광이’→‘늙은이의 망언’…궁금증 키운 김여정의 ‘입’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요즘 조용하다. 그는 지난달 18일 딸을 데리고 국가우주개발국(NADA)을 찾은 이후 이달 3일까지 15일 동안 북한 매체에서 모습을 감췄다. 집권 이후 수시로 공개 석상에서 사라지곤 했기에 새롭지 않을 수 있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35일 동안 공개 활동을 멈췄던 지난 1월을 제외하곤 올해 들어 최장기 공백인 데다,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미(지난달 24~30일) 시기와 시점이 겹친다. 그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징후는 포착되지 않고 있다. 포스트 한·미 정상회담 전략 수립에 몰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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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이’는 북한에서 경어 표현
한·미의 ‘워싱턴선언’ 반응 주목
막말 속 수위조절, 그 의도는?
남북 대화 향한 계기 되었으면
」
공개 자리에서 15일간 사라진 김정은
대신 김 위원장의 입으로 불리는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바빠졌다. 김여정은 오빠의 ‘공백기’에도 목소리를 냈다. 윤 대통령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현지시간 26일)에서 발표한 워싱턴 선언과 관련해서다. 한·미 정상은 핵탄두잠수함(SSBN) 등 미국의 전략 자산을 수시로 한국에 투입해 미국의 대한반도 확장 억제를 강화한다고 발표했다.
한·미의 발표에 대해 김여정은 바이든 대통령이 “북한이 핵을 사용한다면 정권이 종말(end of regime)을 가져올 것”이라고 밝힌 대목을 문제 삼았다. 북한은 김여정의 입장 발표 다음 날에도 조선중앙통신 논평을 냈고, 주민들을 모아 한·미 정상 화형식을 하며 반발 수위를 높이고 있다. “반드시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란 으름장이 이어지고 있다.
김여정이 발표한 입장문에 몇 가지 궁금한 대목이 보인다. 우선 형식이다. 김여정은 한·미 정상의 기자회견 52시간여 만인 지난달 29일 오전 6시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입장을 냈다. 2021년 한·미 정상회담 이후 열흘이 걸렸던 대응 시간과 비교하면 ‘즉각적인’ 반응이다. ‘정권 종말’이란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에 발끈한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김여정은 과거와 달리 성명이나 담화가 아닌 ‘입장’ 형식으로 발표했다. 북한은 중요도에 따라 성명, 담화, 보도, 비망록, 논평, 기자회견 등을 내놓곤 했다. 이번의 ‘입장 발표’는 기존에 없던 형식이고, 성명이나 담화보다 ‘격’이 낮다. 얼핏 반발 수위가 높지만 대내, 그리고 외형적으론 반발하면서도 내용상으로 수위 조절에 나선 모양새다.
성명·담화보다 낮은 ‘입장’ 형식
어투도 다르다. 김여정은 “저능한 청와대” 등 분명하고 저급한 막말을 해 왔다. 지난달 29일에도 “망령” “망언”이라고 저주했지만, 예전과 달리 말꼬리를 흐리는 방식으로 수위를 조절했다. “늙은이의 망령이라고 보겠는가?”라거나 “늙은이의 망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는 식이다.
북한이 2017년 발간한 『조선말대사전』은 ‘늙은이’를 ‘늙은 사람을 좀 높이여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늙은이를 존경하고 예절 바르게 대하는 것은 우리 인민의 고상한 도덕품성’이라고도 적혀 있다. 사전대로라면 김여정의 ‘늙은이’ 표현은 오히려 높임말이 되는 셈이다.
이는 북·미가 한창 각을 세웠던 2017년 9월 김 위원장의 ‘국무위원장 성명’과도 비교된다. 김 위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을 향해 “늙다리 미치광이를 불로 다스리겠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 총회 연설에서 북한을 향해 “완전한 파괴”를 언급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당시 영문 번역본에 ‘dotard(노망한 늙은이)’란 표현과 달리 김여정은 이번에 ‘man’ 또는 ‘old man’으로 순화된 표현을 썼다. 미국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경고가 ‘완전 파괴’에서 ‘정권 종말’로 수위가 높아졌지만 북한은 오히려 눈치를 보는 분위기다. 북한이 노동신문 2면 하단에 이를 배치한 것이나 한·미 정상과 관련한 화형식을 했다고 3일 전하면서도 관련 사진을 공개하지 않은 것도 비슷한 맥락인 듯하다.
지난 3월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윤 대통령이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미사일을 날렸던 북한이 이번엔 잠잠하다. 김 위원장은 집권 이후 이명박·박근혜·문재인 등 진보와 보수 정권을 가리지 않고 한·미 정상회담 전후엔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을 하며 견제구를 날렸다. 지난해 5월엔 바이든 대통령이 방한해 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자 사흘 뒤 평양 순안 공항활주로에서 미사일을 쐈다. 올해 4월까지 군사 정찰위성을 쏘겠다며 지난해 말 노동당 전원회의 결정을 공개했지만 현재까진 조용하다.
북한의 이런 모습이 의도적인 수위 조절인지, 기술적 문제 또는 심각한 경제난에 따른 내부 요인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김 위원장이 다시 등장할 때 어떤 카드를 들고나올지, 북한이 언제 돌변할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최근 김 위원장의 잠적이 더 큰 ‘한방’을 위한 준비 차원일 수도 있다. 북한이 신냉전이라는 분위기에 편승해 한반도에 더 큰 긴장을 초래할 위험도 있다.
더 큰 ‘한 방’ 준비하고 있나
하지만 김 위원장이 눈여겨봐야 할 장면이 있다. 한·미 정상은 워싱턴 선언과 별도로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한반도에서 지속적인 평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북한과의 외교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하며, 북한이 협상으로 복귀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는 메시지다.
또 하나 더 있다. 윤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이 국가우주개발국의 로고까지 벤치 마킹한 미국 항공우주국(NASA)을 찾아 우주 공동 개발을 약속했다. 한·미 정상회담 일주일 전 김 위원장은 “우주산업장성(성장)은 세계적인 경제 및 과학기술 강국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지름길 개척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종합적 국력의 시위로 된다”고 강조했다.
우주 개발은 말과 의지로만 되는 게 아니다. 북한이 대화에 복귀하고, 미국과 관계 정상화에 나선다면 그가 강조하는 과학기술 강국이 자신들의 눈높이가 아닌 국제적 수준으로 될 기회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 남매가 남긴 궁금증이, 김 위원장의 장고(長考)가 악수(惡手)가 아닌 ‘대화를 위한 공간 만들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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