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종외교, 윤석열 대통령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소셜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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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은]
▲ 4월 26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국빈 만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돈 맥클린의 '아메리칸 파이'를 부른 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손을 잡고 있다. |
ⓒ 연합뉴스 |
우리 역사의 굴욕적인 한 장면인 삼전도의 투항은 중국 대륙의 지배권이 명에서 청으로 이동하던 시기에 있었다. 청이 침략하자 남한산성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인조와 신하들은 청의 화포를 앞에 두고서 사대하는 명을 향해 한껏 예를 올렸다. 소설 <남한산성>은 이런 모습을 "몸뚱이는 다 밖으로 내놓고 머리만을 굴속에 처박은 형국으로 천하를 외면하고 삶을 훔치려 한다"고 표현했다.
시대 흐름에 무지했거나 외면했던 결과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비운을 맞이했고 백성들의 삶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최근 한국의 대통령이 일본, 미국과 연이어 정상회담을 하며 고장 난 레코드판 돌아가듯 '가치동맹'을 가는 곳마다 부르짖는 것을 보면서 떠오른 장면이다. 2023년, 지금의 한반도 주변 정세를 400년 전과 단순 비교할 수 없다. 나라의 존재감도, 국격도 그때와 다르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의 외교는 세상 단순하고 편협한 인식을 고집하며 한국의 입지를 좁히고 나라의 존재감을 궁색하게 만들고 있다.
복잡한 국제질서 속에서 실리와 명분을 취해야 하는 국가 간 관계에서 공유하는(혹은 공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가치만으로 관계를 규정하기는 어렵다. 가치에 기반한 이념적 동맹이 작동한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물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등 미국적 가치를 신봉하고 그 가치를 세계에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네오콘(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이 있다. 미국적 가치가 최고 우월하다고 보고 그것을 기준 삼아 선악을 구분지었고, 적과 내 편을 갈랐다.
세계 경제, 평화를 책임지는 미국에 반대하는 국가들을 '악의 축', '불량국가'로 낙인찍어 군사력을 사용해서라도 개조해야 한다는 신념의 소유자들이었다. 하지만 미국적 가치를 다른 나라에 이식하는 데 실패했으며,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말하는 가치동맹의 '가치'는 사실상 미국적 가치와 다름이 없고, 그것을 기준으로 피아를 구분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자유, 인권, 법치'를 신념처럼 강조하는 윤 정부 스스로 그 가치들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미국이 그러한 가치를 온전히 담보하는 나라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철 지난 미국 네오콘들의 신념을 재연하는 듯 한국 대통령이 가치동맹을 역설하는 것이 자기모순이자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이유이다.
더 큰 문제는 윤 대통령의 가치동맹이 미국이 요구하는 역할을 충실히 따르고, 일본과 무조건 함께해야 한다는 맹종 외교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일본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 항의조차 하지 않으면서 북한은 물론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과는 불화를 무릅쓰고 대립각을 세우는 데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한미 정상회담도 미국 측의 환대와 확장억제에 대한 강조 정도를 받아냈을 뿐,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미국이 동맹국인 한국 정부를 도·감청한 사실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문제 삼을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항의도, 재발 방지 요구도 없었을 터이니 도·감청 관련 질문에 동문서답할 수밖에 없었다.
▲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28일(현지시간) 보스턴 인근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에서 '자유를 향한 새로운 여정'을 주제로 연설하고 있다. |
ⓒ 로이터=연합뉴스 |
지난해 11월 프놈펜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른 한국 기업의 보조금 혜택 배제 문제에 대해 대통령실은 "미국 측의 진정성 있는 협의 의지를 확인"했다고 밝혔지만, 이번 정상회담까지 달라진 건 없었다.
미국은 반도체법에 따라 한국 기업에 초과이익 공유와 회계자료 제출까지 요구하고 있으며, 한국 반도체 기업의 대중국 수출 통제까지 했는데 이번 정상회담에서 미국 측이 양보한 것은 없어 보인다.
주지하듯이 미국의 확장억제 제공은 2006년 북한의 핵실험 이후 매년 개최되는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 성명에서 빠지지 않고 확인된 사항이었다. 2016년 북한의 5차 핵실험 후에 미국의 확장억제에 대한 한국 측의 목소리를 더 반영하겠다며 신설한 것이 한미 외교국방 고위급 인사가 참여하는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였다.
이번 워싱턴 선언은 한국의 핵무장 시도는 단념시키면서, 확장억제에 관한 협의 기능을 보다 강화하는 핵협의그룹(NCG)을 신설하고, 지금도 하고 있는 확장억제 훈련과 전략자산 전개를 티 나게 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것을 마치 '핵공유'라거나, 질적으로 다른 수준의 조치인 것처럼 침소봉대할 일은 아니다.
한일 정상회담에서 윤 대통령은 일본이 안고 있던 과거사 부담을 한꺼번에 해소시켜 주었다. 일본 정부의 사과는 충분했으며, 구상권 청구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이 과거사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일본과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거나 일본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명토 박았다.
강제징용 피해자, 위안부 피해자는 물론 한일 간의 과거사 해결과 미래지향적 관계를 바라는 다수 국민들의 의사는 무시되었다. 대통령실은 한일 정상회담을 통해 "일본인의 마음을 여는 데 성공했다"고 자평했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주권에 관한 문제이자 국격에 관한 문제들을 이렇게 독단적으로 취급해도 되는가. 주변 강대국들과 북한과의 관계 문제를 회피할 수 없는 한국이, 평화적 생존과 안정적인 경제활동에 관한 중차대한 문제를 정권의 그 가벼운 성과들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인가.
반도체 수출과 대중국 수출 급감으로 역대급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 봉쇄를 위한 미국의 극단적인 보호주의 조치에 동참할 것을 한국이 강요받고 한국 기업이 피해를 입는 것이 "자유, 인권, 법치"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핵 위협을 주고받는 공멸의 압박이 있으니 비로소 한반도는 더 평화로운가. 이 땅은 더 거친 위협과 무기 자랑이 일상이 되는 화약고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한미 정상회담 직후 북측은 "한미 연합연습과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에 맞추어 북한이 계획한 국방력 강화를 추진하고, 유사시 핵무기를 선제공격 수단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줄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혹시 모를 충돌 가능성을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한데,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국의 협력을 이끌어낼 능력이나 의지가 있는가.
▲ 박정은 /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
ⓒ 박정은 |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박정은은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이며 <소셜 코리아> 편집·운영위원이기도 합니다. 2000년부터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평화군축, 국제연대 활동에서부터 정치개혁, 검찰개혁 활동, 사회정책 관련 연대 활동 등에 주력했습니다. 2018년부터 4년간 참여연대 사무처장직을 맡았고, 정치개혁공동행동 집행위원장, 시민평화포럼 운영위원장직을 수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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