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브리병, 치료제 있지만… "여성 환자서 약 보험 차별"
◇지방산 분해 효소 無… 장기가 서서히 망가지는 유전 질환
파브리병은 성염색체 중, X염색체에 돌연변이가 발생해 유전되는 희귀질환이다. 지방산을 분해하는 ‘알파 갈락토스화물분해효소’가 부족하거나 아예 없어, 몸에 지방산이 축적되는 게 특징이다. 이 과정에서 세포 기능이 떨어지며 심장, 콩팥, 뇌, 눈 등 신체 기관 기능이 저해된다.
파브리병 유병률은 인구 11만 7000명 당 1명꼴로 알려졌다. 국내엔 200~300명의 환자가 파브리병 진단을 받았고, 아직 진단받지 않은 환자까지 포함하면 약 500명의 환자가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극히 드문 질환이다 보니, 의사로서도 환자의 증상이 파브리병 탓일 거라 생각하기 어렵다. 여의도성모병원 신장내과 정성진 교수는 “건강 이상으로 방문한 환자에게서 뚜렷한 원인 질환을 찾기가 어려울 때, 이 질환도 원인이 아니고 저 질환도 원인이 아닌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의심하는 게 파브리병”이라고 말했다.
여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파브리병 환자에게서만 관찰되는 특이한 증상이 마땅히 없는 데다, 같은 파브리병 환자끼리도 증상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증상이 나타나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어른이 돼서야 발현되는 환자도 있다. 누군가는 심장부터, 누군가는 콩팥부터 이상이 생긴다. 신경통이나 눈·피부질환 등의 증상이 먼저 시작되는 환자도 있다. 정성진 교수는 “환자마다 증상과 발현 시기가 제각각이긴 하나, 보고에 따르면 ▲통증 ▲혈관각화종 ▲단백뇨 ▲땀감소증 ▲복통 ▲좌심실비대 ▲뇌졸중 ▲협심증 ▲만성콩팥병(신부전) 등의 증상을 주로 경험한다”고 말했다. 가톨릭대 성빈센트병원 순환기내과 김지희 교수는 “어릴 때부터 증상이 나타난 환자들은 손이 압정에 찔린 듯 따끔따끔한 신경통을 많이 호소한다”며 “어린아이다 보니 성장통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내원한 환자가 파브리병 진단을 받으면, 의사들은 환자의 부모와 자식세대까지 파브리병 진단 검사를 받도록 권한다. 가족 중에 또 다른 환자가 있을 수 있어서다. 범위를 넓혀 형제자매나 친척까지 검사를 권유할 때도 있다. 그러나 환자의 가족들이 실제로 검사받는 비율은 극히 낮다. 유전 질환 환자로 밝혀지는 것을 일종의 ‘낙인’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는 데다, 파브리병을 진단받을 경우 2주에 한 번은 치료제를 투여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진단 전과 후로 삶이 달라지다 보니 검사 자체를 회피하는 사람이 많다.
◇치료하면 수명 연장 확실… 복용 쉬운 ‘경구치료제’도 있어
파브리병 환자는 몸에 부족한 효소를 대체할 수 있는 성분을 정맥 주사로 투여받는다. 이를 ‘효소대체요법’이라 한다. 주로 사용되는 약은 ▲사노피의 ‘파브라자임’과 ▲다케다제약의 ‘레프라갈’이다. 레프라갈은 한 번 맞을 때 40분이, 파브라자임은 한 번 맞을 때 약 4시간이 걸린다. 투여시간이 더 긴 만큼 파브라자임의 효과가 레프라갈보다 좋으리라는 추측이 있으나, 지금까지의 데이터에 의하면 두 약을 투여받은 환자들의 장기 생존율이 크게 다르지 않다. 김지희 교수는 “두 약 중에서 어느 하나가 더 좋다고 말하기엔 아직 데이터가 부족하다”며 “다만, 치료와 일상생활을 병행하는 환자에겐 투약 소요 시간도 효과만큼 중요하므로 환자에게 이런 상황을 알리고 약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파브리병이 진행되며 망가진 장기가 원상 복구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빨리 진단해 치료를 시작하면 장기가 망가지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 희귀질환임에도 장기간 생존하는 파브리병 환자가 많은 이유다. 50대에 김지희 교수를 만나 파브리병을 진단받은 환자는 올해로 8년째 잘 치료 중이며, 정성진 교수의 환자 중엔 80대도 있다. 김지희 교수는 “치료를 받으면 수명이 확실히 연장된다”며 “해외 데이터를 보면 치료받은 환자는 치료받지 않은 환자보다 수명이 10여 년 더 길다”고 말했다.
파브리병은 치료제가 있는 몇 안 되는 희귀질환 중 하나다. 파브리병 환자들을 애타게 하는 건 ‘치료제 유무’라기보단 ‘급여 기준’이다. 급여 적용 문턱이 높은 탓에 좋은 약이 있어도 제대로 써 볼 수 없는 환자가 많아서다. 장기가 아직 건강할 때 치료를 시작하는 게 최선이다. 그러나 현행 보험 급여 체계가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한다. 효소대체요법 치료제는 파브리병으로 말미암은 장기 손상이 입증된 환자에게만 급여가 적용된다. 심장 좌심실이 12mm보다 두꺼워진 게 자기공명영상(MRI)이나 심초음파로 관찰되는 식이다. 이에 파브리병을 조기에 진단받는 데 성공해도, 급여 기준을 만족하지 못해 치료제를 쓰지 못하는 환자가 많다. 치료제를 비급여로 투여하면 주사를 한 번 맞을 때마다 1000만 원이 들기 때문이다.
여성 환자와 남성 환자의 급여 기준이 다른 게 차별이란 지적도 있다. 효소대체요법 치료제 급여 기준 중, 콩팥(신장) 항목의 기준은 여성 환자에게 더 엄격하다. 남성은 단백뇨가 24시간에 150mg을 초과하면 급여 적용이 되지만, 여성은 300mg을 넘어야 한다. 급여 기준은 ‘누구에게 치료제가 더 절실한지’ 따져서 결정된다. 파브리병은 여성보다 남성에서 질환 심각성이 더 크고, 치료제도 더 절실하다고 본 셈이다. 추정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파브리병 환자에게 부족한 효소를 만드는 유전자는 성염색체 중 X염색체에 있다. X염색체가 두 개인 여성(XX) 파브리병 환자는 하나의 X가 문제여도 다른 X가 정상일 수 있지만, X염색체가 하나뿐인 남성(XY) 파브리병 환자는 이상이 있는 X만 보유하게 된다. 이에 파브리병은 여성보다 남성에게서 증상이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거시적인 경향일 뿐, 환자 개인의 측면에서 보면 여성 환자의 파브리병이 ‘덜 힘들다’고 하기 어렵다. 정성진 교수는 “여성 환자가 비정상 X 외에 정상 X를 갖고 있더라도, 비정상 X가 정상 X보다 활성화되면 남성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증상이 나타난다”며 “성별에 따라 급여 기준을 다르게 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갈라폴드를 1차 치료제로 사용할 수 있게 급여 기준이 개정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현재 1차 치료제로 사용되는 효소대체요법 치료제를 투여받을 수 있는 곳은 대학병원이 대부분이다. 환자가 직장인이라면 2주에 한 번씩 평일에 휴가를 내고 주사를 맞으러 내원해야 한다. 김지희 교수는 “효소대체요법 치료와 일상생활을 병행하기 어렵다 보니, 치료를 받다가도 투약을 중단하는 환자가 많다”며 “경구치료제 ‘갈라폴드’가 1차 치료제로 급여화되면 환자들이 더 쉽게 치료받을 수 있으니 치료 중단 비율도 낮아질 것”이라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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