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서 나는 민얼굴로 외출한다

황성혜 2023. 5. 3. 16:3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외출하기 전 준비 시간은 단 5분,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황성혜 기자]

색조 화장품을 사서 이 년이 지났는데 아직 새것처럼 그대로 남아있다. 매일 화장은 안 하더라도 화장할 때를 대비해서 파운데이션, 아이섀도, 아이브로우 펜슬, 마스카라, 립스틱을 기본적으로 하나씩 구비해 두었는데 립스틱과 아이브로우 펜슬을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 쓰지 않았다. 화장품은 개봉한 지 대략 1년 반이 지나면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해야 한다고 하는데 사용감이 없는 화장품을 선뜻 버리기 어렵다.     
나는 평소에 메이크업을 거의 하지 않는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공식적인 자리에 갈 때나 생일과 같은 특별한 날에는 가벼운 화장이라도 하지만 평상시에는 거의 민얼굴로 외출한다. 아이브로우 펜슬로 간단히 눈썹만 슬쩍 그려주고 입술에 살짝 립밤을 발라주면 끝난다. 그마저도 안 하고 로션과 선크림만 바르고 나가는 날도 허다하다.      
 옅은 화장을 한 여성
ⓒ 픽사베이
 
원래부터 화장을 안 했던 건 아니다. 처음 싱가포르에 왔을 때는 집 밖에 나갈 때마다 화장을 했고 심지어 아파트 단지 안 수영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갈 때도 가벼운 화장을 하고 나갔다. 수영장 벤치에 앉아 책을 읽으며 아이들을 기다리는 동안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내 민낯을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슈퍼마켓에 갈 때도 동네 카페에 갈 때도 어김없이 화장을 하고 갔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싱가포르 사람들은 내가 굳이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내 국적을 알아맞혔다. 내가 한국 사람인지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 여성들은 화장도 예쁘게 하고 옷도 잘 입어서 싱가포르 여성들과 다르다고.    
  
싱가포르에 오기 전 나는 한국에서 수입 의류 브랜드와 수입 화장품 브랜드 홍보팀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대외활동을 많이 하는 홍보팀에서 내 이미지는 곧 회사의 이미지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에 브랜드 이미지에 맞는 화장을 하고 옷을 입었다. 화장한 내 모습이 좀 더 생기 있어 보여 좋았고 거울을 보면 자신감도 생겼다.

메이크업을 하는 것은 사회적인 강요였기보다는 내 선택이었다. 외모를 꾸미는 데 할애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한국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싱가포르에 와서 아이들을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면서도 끊임없이 화장했던 건 아마도 무의식 중에 몸에 밴 습관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현지 유치원에 입학한 후 싱가포르 엄마들을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아이들 친구들 생일 파티에 늘 아이와 함께 나도 초대받아서 참석했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워킹맘이어서 파티는 주로 주말에 열렸다. 나는 풀메이크업은 아니더라도 옅은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고 파티에 갔는데 현지 엄마들은 화장을 한 사람들보다 안 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옷도 아이들과 놀아주기 편한 차림으로 왔다. 내가 한국 사람인 걸 알게 된 현지 엄마들은 한국 여행을 가서 먹은 음식, 즐긴 풍경도 이야기했지만 한국 여성들은 하나같이 화장을 예쁘게 하고 옷을 잘 입는다는 말을 꼭 덧붙였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년 학부모 상담을 하기 위해 학교에 갔다. 내 눈에 비친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의 모습은 그저 수수하게만 보였다. 블링블링한 옷을 입고 치장을 한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주말 아침 브런치를 먹으러 카페에 가도 그랬다. 주위를 둘러봐도 간편한 복장에 민얼굴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백화점에 가도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차려입은 사람들도 있지만 소박한 차림으로 온 사람들도 많았다. 남편 회사 동료들 모임에 같이 가 봐도 별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경우 모두들 풀메이크업을 하고 과감한 드레스를 입고 와서 나는 깜짝 놀랐다. 때와 장소에 맞게 화장을 하고 옷을 입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싱가포르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쳤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젊은 싱가포르 직장인들이어서 퇴근 후 수업을 들으러 왔다. 교실로 들어오는 학생들의 모습을 살펴보니 비즈니스 캐주얼은 입었지만 화장기 없는 민얼굴로 온 학생들이 꽤 많았다. 사실 내 고정관념으로는 그 모습이 조금 낯설게 보였다. '싱가포르에서는 회사에 화장하지 않고 가도 괜찮나?'하는 의문이 생겼다.

학생들과 서로 가까워진 무렵 나는 조심스레 학생들에게 노메이크업으로 출근하는 게 괜찮은지 물어봤다. 학생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상관없다고 말했다. 언어교육원에서 일했던 몇 년 동안 젊은 직장인들과 대화하면서 나는 싱가포르가 참 캐주얼한 사회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적어도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싱가포르에 오래 살면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에 익숙해졌다. 메이크업하지 않고 일을 하러 갈 때도 많다. 50대가 되어 눈가의 주름도 깊어지고 피부의 탄력도 떨어졌다. 화장하지 않은 내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점 없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내 얼굴이 낯설게 보일만큼 화장하지 않는다.

화장을 하는 것도 화장을 하지 않는 것도 내가 주체가 된 내 선택이다. 민낯의 모습도 화장한 모습도 있는 그대로의 나이다. 민얼굴을 당당히 드러내고 외출할 수 있는 건 아마도 내가 싱가포르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덕분인 것 같다. 화장만 안 했을 뿐인데 삶이 단순해졌다. 꾸밈없는 삶은 나에게 편리함을 선물해 주었다. 내 본연의 모습을 좋아하게 되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