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맑은 눈의 광인'은 여자일까?
[이진민 기자]
▲ 영화 <드림> 포스터 |
ⓒ 플러스엠 |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닌데 눈이 티 없이 맑아서 무서운 사람들이 있다. 옛 선조들이 반드시 피하라고 했던 사람들이 이런 부류일까. 맑은 눈에 알 수 없는 광기를 가진 일명 '맑은 눈의 광인'이 한국 영화계에 나타났다.
영화 <극한직업>으로 천만 관객을 맛본 이병헌 감독의 <드림>은 오합지졸 홈리스 국가대표 선수들이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시작은 다큐멘터리 PD인 '소민(아이유 분)', 영화 내 유일한 주연 여성 캐릭터이자 입꼬리만 올린 채 조곤조곤 욕하는 맑은 눈의 광인이다.
▲ 영화 <드림> 스틸컷 |
ⓒ 플러스엠 |
소민은 신파 가득한 다큐멘터리로 한탕을 노리는 PD다. 그래서 그는 시청자가 울 법한 감동실화를 만들기 위해 국가 대표 축구팀인데 '축구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연 많은 사람을 선수로 뽑는다. 그렇다고 촬영에 적극적인 건 아니다. 열정은 오르는데 임금이 안 올라서 진작에 열정도 최저임금에 맞췄단다.
학자금 대출로 푸르른 청춘이 평일 퇴근길처럼 정체되었고 같이 일하는 국대팀 코치이자 전직 축구선수 '홍대(박서준 분)'는 시종일관 삐딱하며 촬영장에서 도망갈 생각만 한다. 그러니 소민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그래도 사회생활하려면 미쳐도 '곱게' 미쳐야 하니, 해맑은 표정으로 손가락 욕을 날리는 '맑눈광'의 전략을 택한다.
홈리스 선수들이 훈련을 거부하고 코치인 홍대가 냅다 축구장에서 도망쳐도 소민은 화를 내지 않는다. 그저 미소를 띠며 '내 길 막지 말고 정신 차려라'고 말한다. 다큐멘터리 PD답게 편안한 셔츠 차림에 목에 수건을 두르고 뛰어다니는 소민. 미친 세상에서 미친 사람으로 사는 게 정상이라 자조하지만,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내려놓지 않는 근성만은 진짜 미쳤다.
▲ 300만 부 이상 판매된 페미니즘 고전 <여성과 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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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화 매체에서 '맑은 눈의 광인'은 사랑받는 캐릭터인데 그들이 주로 여성이란 점은 흥미롭다. 영화 <드림>의 소민, < SNL 코리아 >의 김아영처럼 맑은 눈을 가졌지만, 어딘가 광기가 엿보이는 캐릭터들은 여성이다. 여성의 광기가 친절한 얼굴을 가진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여성에게 금기되는 것과 요구되는 것을 모두 충족하기 위한 생존전략이다.
예로부터 여성의 광기는 허락되지 않았다.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 속에서 그들이 느낄 법한 분노, 무기력, 슬픔은 모두 광기로 치부되어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고통을 표현하면 '미친 여자' 취급받았다. 또한 여성 차별에 맞서는 페미니즘은 SNS상에서 '광기의 페미니즘'이라 불리며 여성이 자신만의 생각과 삶을 갖는 과정에 '광기'라는 단어가 씌어졌다.
반대로 여성에게는 과도한 친절함이 요구된다. 사내 업무 평가에서 남성보다 여성에게 친절함의 척도가 엄격하였다는 연구 결과와 '친절함'을 대표하는 서비스인 공공시설 안내 방송, AI의 목소리가 여성이란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러니 광기를 금지하고 친절함만 강요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맑은 눈의 광인'이 될 수밖에 없다.
해맑은 표정과 하이 톤 목소리로 할말 다 하는 영화 <드림>의 소민은 현실 속 여성들과 닮았다.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는 당당함과 그 와중에 친절함은 잃지 않는 안쓰러움 사이. 소민은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싸울 우리들의 모습으로 스크린에서 걸어 나온다.
▲ 영화 <드림>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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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림>은 홈리스 국가 대표 선수들의 이야기로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도, 경기장 밖 스태프도 모두 남성이다. 홈리스 선수들의 사연에서 등장하는 여성 인물을 제외하면 소민은 영화 내 유일한 여성 캐릭터다. 남성들의 이야기에 여성은 딱 한 명 등장하고 그가 '맑은 눈의 광인'이란 점까지 현실적이어서 좋다.
그럴듯한 드라마를 찍어 성공하겠다는 소민은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팀원들과 함께 소리 지르고 눈물까지 글썽인다. 누군가의 무심이 진심이 되는 순간, 경기는 시작된다. 집은 없어도 꿈은 있다는 영화 <드림>의 해맑은 광기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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