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인데 판매율 90%, 감동을 사간 어른들

이준수 2023. 5. 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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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산불 피해 주민 도우려 기부 마켓 연 아이들...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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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수 기자]

양양과 강릉, 동해와 삼척. 나는 지난 십 수년간 강원도 영동 지방에서 초등교사 생활을 했다. 그간 인상적으로 느낀 것이 있다면 바닷가 동네 사람들끼리 교류가 무척 활발하다는 점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친인척을 방문하거나 공연 관람, 병원 진료 등 생활 편의를 누리기 위해 다른 해안가 도시를 자주 방문했다. 옆 동네에 마실이라도 다녀오는 것처럼.

같은 시나 군 내에서 움직이지 않고, 행정구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생활 양식은 대도시에서 자란 내게는 약간 낯선 모습이었다. 절대적 거리를 따지자면 동해안 도시 간의 거리는 꽤 멀다. 가령 삼척 시내에서 강릉 중심지까지는 60km가량 떨어져 있다. 하지만 교통 체증이 거의 없는 탓에 수도권에서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거리를 한 시간 안에 가벼운 마음으로 다닌다.

올해 내가 담당하고 있는 양양 아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4월 초 강릉에서 산불이 발생하자 아이들은 '우리 마을'이 불탄 것처럼 가슴 아파했다. 

"지난 주말에 경포 호수에서 놀았거든요."
"저는 열감기 때문에 월화거리 쪽 소아과에 다녀요. 치과도 강릉 치대 가요."

양양에 사는 우리 반 어린이들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강릉과 연결되어 있었다. 산불 뉴스를 볼 때도 다르지 않았다. 동해안의 산불 소식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울진에서도 큰 불이 일었고, 고성에서도 화재가 발생했다. 그러나 피해 정도를 떠나 산불 뉴스 화면에 보이는 배경이 내가 가 본 곳이면 관심도가 대폭 상승하게 된다. 

산불 피해를 안타까워 한 아이들

아이들은 불타는 마을을 중계하는 화면 속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부모님 손을 잡고 벚꽃 놀이를 다녀온 곳이 새까맣게 타서 짙은 연기를 내뿜고 있으면 묘하게 현실 감각이 옅어지는 듯했다. 아이들은 말도 안 된다는 말을 자꾸 되뇌었다.

"우리 자원봉사 갈까요?"
"야, 쌤 마음대로 되냐? 하조대에서 거기까지 어떻게 가."

한 녀석이 기특한 제안을 하였지만, 짝꿍이 핀잔을 주었다. 속상한 마음은 매 한 가지여도 수업을 빼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 반 다섯 명의 아이들은 저 나름대로 안타까움을 담아 강릉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던 중 학교 운영위원회에서 4학년 학부모님이 낸 아이디어가 해결의 실마리가 되어 주었다. 

"4월 27일에 하조대 마켓 행사가 열리는데 아이들이 참여하는 건 어떨까요?"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벼룩시장 형태로 부스를 열어 물품을 판매하고 그 수익금을 '강릉산불 돕기 성금'으로 내는 것이다. 가는 김에 해변 쓰레기도 좀 줍고, 부스 운영과 정리까지 지도한다면 행정적으로도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다. 교장선생님께서도 취지에 적극 찬성하며 응원을 보내주셨다. 
 
 아이들이 제작한 마켓 수익금 기부 안내 포스터
ⓒ 이준수
 
"우리 수업 안 하고 하는 거예요?"
"봉사활동 수업으로 가는 거예요."

아이들에게 대강의 계획을 설명하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솔직히 봉사활동보다는 수업 시간에 교실을 벗어나 파도치는 해변으로 가는 것이 더 신나 보였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때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즐거운 수단을 동원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소박한 마음으로 작은 정성을 보여주자는 초반의 취지와 달리 판매 물건이 무더기로 쌓이기 시작했다. 시골 학교의 다섯 명 밖에 되지 않는 아이들이 도시의 큰 학교 스무 명 규모의 물품을 싸들고 왔다. 다른 학년 물건까지 합쳐지자 물건을 보관할 장소조차 마땅치 않게 되었다. 

돗자리 한 두 장 규모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부스 한 칸 크기로 불어났다. 나는 슬슬 걱정이 되었다. 행사가 일주일도 남지 않았는데 가격표도 없는 상태로 물건만 쌓였다. 일단 가격을 매기는 것부터 혼선이 빚어졌다. 

"이 보드게임은 내가 너무 아끼는 거니까 오천 오백 원."
"포켓몬 카드는 스무 장에 천 원에 팔 거야. 희귀템이거든."

아이들은 상당히 주관적인 견지에 따라 가격을 책정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물건에 지나치게 비싼 값을 부르는 경향이 있었다. 중고였음에도 불구하고 마트 판매가에서 겨우 소액만 내려 팔려고도 했다. 나는 하나하나 가격 조정을 할 수 없어서 기준을 세웠다.

"여기가 당근마켓이라고 생각하고, 팔릴 물건을 팔릴 만한 가격에 내놓는 거예요."

기부 금액을 늘리고 싶은 마음에 뻥튀기시켜 놓은 가격을 시장의 눈높이에 맞추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물건을 보관하느라 일주일 간 교실 뒤편이 창고처럼 변해버렸다. 아이들은 교실이 지저분해지건 말건, 기분이 한껏 좋아져서는 쉬는 시간마다 상점 놀이를 했다. 

미술 시간에는 포스터를 제작했다. '산불 돕기 기부'라는 봉사활동의 목적을 까먹지 않고, 판매 수익금이 우리의 용돈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 것이다. 대신 마켓 당일에 학급 운영비로 쮸쮸바를 사주겠다고 하자 아이들은 의기충천하여 포스터를 그렸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어른들

그렇게 열흘 가량의 준비기간을 거쳐 바닷가의 마켓으로 향했다. 학교에서 걸어 오백 미터 남짓한 곳이지만, 짐을 주렁주렁 매단 탓에 거대한 피난 행렬처럼 보였다. 차량 한 대에 짐을 가득 싣고도 그 정도였으니, 작은 시골 학교 아이들이 집에서 있는 것, 없는 것을 그러모아 준비한 회심의 기부 행사라는 것은 확실했다. 
 
 준비한 물품의 90%를 판매하며 기분 좋게 마무리된 아이들의 기부 마켓
ⓒ 이준수
 
마켓이 위치한 하조대 해변은 밝은 햇살로 빛났다. 따뜻하고 짭조름한 바람이 불었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펼쳐졌다. 6학년에서 제작한 'GJ MARKET' 현수막을 걸어 부스를 차렸다. 기둥에는 우리 반 아이들이 그린 산불기부 포스터를 붙였다. 돗자리 여덟 장을 이어 붙인 후 물건을 나열하자 제법 장터 분위기가 났다.

로컬 마켓 행사에는 우리 학교를 제외하고도 열 팀이 넘는 부스가 함께 했다. 대부분 하조대 인근과 양양 일대에서 활동하시는 분들로 생활 소품과 맛깔난 음식 등 정성이 가득 담긴 상품이 주를 이루었다.

가격대도 비싸지 않고, 개성 넘치는 제품이 많았다. 특히나 서핑으로 유명한 동네인 만큼 '웨트슈트'와 '비치웨어', '루즈핏 티셔츠' 같은 아이템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네잎클로버가 그려진 양말과 줄무늬 양말 두 켤레를 샀다. 

우리 학교 부스는 굉장한 지지와 관심을 받았다. 판매 수익금을 전액 기부하겠다고 내건 유일한 부스였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내가 예상한 판매율은 50%였다. 초등학교에서는 거의 매년 벼룩시장과 나눔 장터를 연다. 그렇기에 물건의 개수와 품질, 종류를 보면 어느 정도 판매 결과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마켓에 참여한 어른 또한 지역주민이며 강릉 산불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영동 지방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안 팔린 물건 있으면 아줌마한테 말해. 사줄게."

아이들이 소리 높여 물건을 판매하고 있으니 다들 한 번씩 들러 작은 물건이라도 사 주었다. 어떤 분들은 물건을 사지 않고 기부금만 내고 가기도 했다. 시골에는 아이들이 귀하니 아이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학생들에게 나눠줄 생수를 사러 갔더니 어린이들 고생한다며 카페 사장님이 얼음물 스물다섯 컵을 담아 캐리어에 담아주는 일도 있었다. 종이봉투에는 카페에서 판매 중인 구움 과자가 수북이 들어있었다. 스물다섯 명 아이들이 모두 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과자를 다 먹을 즈음에는 행사장에 들른 또 다른 어른 한 분이 아이들에게 어묵을 사주셨다. 뭐랄까, 그 장소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돕고 싶어 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기부는 기쁨이고 재밌는 일이라는 깨달음

오전 10시부터 12시 30분까지 두 시간 조금 넘게 진행된 기부 마켓은 90% 이상 물건을 판매하고 끝이 났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급식을 먹고, 도서관에서 수익금 정산을 했다. 총액은 놀랍게도 23만 2천3백 원. 전교생이 스물다섯 명인 학교에서, 무진장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을 판매한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액수였다. 아이들은 모두들 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아마도 몇몇 어른들이 물건을 사지 않고 넣어둔 지폐 기부금도 섞여 있었겠지만, 우리가 기획하고 판매하여 20만 원이 넘는 돈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아이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기부라고 하면 연말 '구세군 불우이웃돕기' 행사처럼 점잖고, 엄숙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이 느낌는 우선적 감정은 기쁨에 가까웠다. 그것을 지켜보던 나도 아이들과 덩달아 웃어버렸다. 

기부는 기쁨이고, 재밌는 일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의도치 않았고, 생각치도 못 했던 결론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기부는 웃음'이라는 결말에 도달했다. 정말 멋진 마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릉 산불 피해주민을 위해 시작한 일이 결국은 우리를 위한 일이 되었다. 

수학 시간에 1에서 1을 빼면 0이 된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무언가를 하나 빼도 0이 아닐 수 있다고 가르쳐도 될 것 같다.
 
 기부에 참여한 분들을 위한 사은품과 수익금 23만 2천 3백 원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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