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기자들이 일본 도다이지 돌길 위에 나란히 선 이유
일본 나라현 나라시에 위치한 사찰, 도다이지(東大寺)에 들어서려면 나무로 만든 거대한 남대문을 지나야 한다. 빨간색과 초록색, 노란색의 예전 빛깔을 보존해둔 안쪽 건물들과 달리 이 남대문은 나무 본연의 색깔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시간을 고스란히 안은 나무 문턱을 넘으면, 과거로 향하는 여행의 출발선에서 마음을 가다듬는 느낌이다.
지난달 이 문을 지나며 일본인 동행에게 물었다. “예전 모습에 맞춰서 자꾸 칠하는 게 좋은 것 같아, 아니면 이렇게 시간이 가는 대로 두는 것이 좋은 것 같아?” 그는 답했다. “좋고 나쁘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 그런데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일본다운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한다. 완벽한 재현만이 위엄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과 자연스러움이 건네는 가르침이 있기에 그렇다.
지난달 23일 도다이지 곳곳에선 이런 대화가 흘러나왔다. 한중일3국협력사무국(Trilateral Cooperation Secretariat, TCS)이 19일부터 11일간 마련한 ‘동아시아문화도시(CCEA) 미디어·온라인 인플루언서 투어’에 참가한 10여명이 이곳을 방문했다. TCS는 3국의 문화적 유대감과 인적 교류를 강화하고 상호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경주시와 일본 나라시, 중국 양저우시를 3국 참가자들이 함께 견학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한국 동아시아문화센터, 중국 공공외교협회, 일본 자치체국제화협회 등이 투어를 지원했다.
도다이지 승려가 3국 참가자들에게 내민 단어, '연(緣)'
일본불교 화엄종의 본산 도다이지는 3국 교류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특히 크다. 8세기 초 쇼무 천황은 권력 투쟁과 전염병으로 혼란스러운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사찰 건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한다. 최대 규모의 청동 대불과 목조 건물을 짓기 위해 중국 건축 기술을 들여왔고, 백제와 신라 출신 기술자들의 노력도 보탬이 됐다.
이런 교류의 역사는 대웅전으로 가는 돌길에도 남아 있다. 약 50년 전에 인도와 중국, 한국, 일본에서 온 돌을 구해다 바닥에 나란히 일렬로 깔아둔 것이다. 일본에다 불교를 전파한 순서에 따른 배치라고 한다. 투어 참가자들을 인도한 모리모토 스님은 한중일 3국 참가자들을 각국에서 온 돌 위에 서게 한 뒤 “사람과 사람 사이 ‘연(緣)’을 중요시해 달라”고 당부했다.
내가 선 길을 넘어 이웃의 길과 연(緣)까지 생각하는 정신은 청동 대불에서도 엿볼 수 있다. 불상 아랫단 연꽃잎 위에 새겨진 그림들은 수많은 세계가 연결되고 연속하고 있다는 연화세계의 상징이다. 일부 꽃잎들은 과거 도다이지에 큰 불이 났을 때 녹아내리면서 그림이 지워지고 뭉툭해져 있다. 녹아내린 곳들은 그 나름대로 현대인의 상상에 맡겨진다. 분절된 세계에 다시 글자를 새기고 연결하는 것은 남은 우리 몫이다.
이 불상이 오늘날 내뿜는 아우라는 이런 연(緣)에 대한 상상과 시간이 담긴 결과다. 도다이지가 두 차례의 큰 화재를 겪고도 재차 일어날 수 있었던 건 이런 마음들 때문이었을 거다. 도다이지 건립 당시 ‘한 줄기의 풀, 한 줌의 흙이라도 보태자’는 정신에 따라 260만명이 동참했다고 한다. 모리모토 스님은 “모든 일본인의 조상 중 한 명은 동참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도다이지에 스며든 한중일 교류의 흔적
도다이지 곳곳에선 첫 투어 장소인 경주를 떠올리는 일도 잦았다. 많은 사람이 먼 거리에서도 청동 대불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내어둔 대웅전 창문 앞에서 불국사의 석등을 떠올린다. 참가자들과 함께 불국사 석등 창을 통해 엿본 대웅전 불상 얼굴이 생각나서다. 도다이지 대불에 가까이 오르는 계단에선 마음가짐을 공손하게 한다. 불국사의 계단을 거닐었던 기억이 떠올라서다. 이경애 문화해설사는 앞서 불국사를 방문한 투어 참가자들에게 “사찰 건물에 오르는 계단을 일부러 좁게 만들어 사람들이 겸손한 마음과 자세로 오를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과거 일본과 한반도 사이 교류의 흔적들도 찾아볼 수 있다. 투어에 동행한 나이토사카에 일본 오사카 시립 미술관장은 “도다이지 한편에 있는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 쇼소인(正倉院·정창원)에 백제와 신라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 양저우에 있는 대명사(大明寺)는 도다이지와 도쇼다이지(唐招提寺) 풍경과 더욱 닮았다. 절이 불에 타지 않도록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지붕에 달아둔 물고기 꼬리 모양 장식만 떼어 보면 여기가 나라인지 양저우인지 헷갈릴 정도다. 당나라 고승 감진대사가 연결고리다. 일본에 불교를 전파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감진대사는 도다이지와 도쇼다이지에서 불교와 각종 학문을 가르쳤다. 감진대사가 일본에 도착하기까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섯 번의 실패가 있었다고 한다. 태풍을 만나는 등 매번 어려움에 봉착해 여정을 중간에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여섯 번째 시도 끝에야 일본에 다다를 수 있었는데, 동행한 제자들이 숨지고 감진대사 본인도 시력을 잃은 뒤였다. 투어 버스에 오르고 내릴 때면, 감진대사 일행이 목숨을 걸고 배에 올랐던 여정을 생각하곤 했다. 11일간 세 나라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서로의 문화와 역사를 나누는 일이 새삼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감진대사가 일본과 중국 간 교류를 나타내는 아이콘이라면, 중국과 한국 참가자들은 신라의 학자 최치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양저우에 있는 최치원 기념관 한편에는 고려왕조의 문신 정몽주의 동상도 볼 수 있다. 그는 명나라에 여섯 번 다녀갔다고 한다. 김형준 주오사카대한민국총영사는 지난달 23일 나카가와 겐 나라 시장이 마련한 투어 환영 만찬에서 “한중일 3국은 지난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여러 방면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해왔다”고 했다.
"인적·경제적 교류는 멈추지 말아야"
물론 3국 교류의 역사에 핑크빛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장 투어 기간인 4월 말은 외교 뉴스가 쏟아질 때였다. 일본 기시다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해 한국 정부가 유감을 표명했고, 윤석열 대통령이 대만 문제를 언급한 것을 두고 중국 정부가 ‘말참견’이라는 표현을 써 공방이 벌어졌다. 윤 대통령의 이른바 ‘일본 무릎 발언’ 기사, 기시다 총리의 방한 예정 기사가 나올 때 한국과 일본 참가자들은 한 자리에 있었다. 과거 3국이 서로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올린 탑들, 불국사를 지키는 사천황이 혼도시(일본 속옷)를 입은 괴물을 밟고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간 3국이 지나온 다사다난한 역사가 눈앞에 흘러간다.
그래서 투어 기간 동안 만나는 3국 지자체 관계자, 각국 정부 당국자들에게 물었다. “당장 해결하지 못한 역사적·외교적 문제가 지금 이 순간에도 터져 나오는데, 여기 모인 우리가 문화 유적의 공통점을 찾아다니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들은 공통으로 “정세를 떠나 사람들이 대면으로 교류하고 각국 지자체끼리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고 답했다. 도다이지 길바닥에 이웃 3국의 돌이 모였듯, 결국 우리는 모두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특히 어우보첸 TCS 사무총장은 지자체 간 교류에 큰 의미를 뒀다. 그는 “경주와 나라, 양저우같이 3국의 지자체가 인적·경제적 교류에 대한 큰 의지를 가진 것을 재확인했다”며 “코로나19로 인해 갑작스레 닥쳐온 물리적인 단절을 각국이 경험하면서 3국 교류가 가진 유무형의 힘을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한중일 3국 참가자들이 11일간의 여정을 함께 보내며 대화하고 서로를 이해했던 순간들을 생각하면, 이상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카가와 겐 나라 시장은 이 같은 인적 교류로 형성한 친밀감은 3국이 각자 마주한 문제를 타개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지난달 28일 투어를 마무리하는 심포지엄에서 “저출산과 고령화와 같은 문제에 직면한 3국은 현재 같은 출발선에 서 있다”며 “민간이 우호적으로 교류하며 서로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주낙영 경주 시장 역시 “동아시아의 공동번영과 평화를 위해선 중앙정부보다 국제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자치단체 간 국제교류가 더욱 활성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투어 도중 양저우에서 만난 주 시장과 나카가와 겐 시장, 왕진젠 양저우 시장은 ‘양저우 이니셔티브’를 선언하고 3국 간 관광·경제·청소년 교류를 확대해나갈 것을 약속했다.
오효정 기자 oh.hyo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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