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우리나라 판결문 공개 비율은 0.3%에 불과하다?
검색 제한 등 접근성은 떨어져…기계 판독 안돼 AI 인프라 구축 제약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우혜림 인턴기자 = 인공지능(AI) 기술이 민간을 넘어 공공영역으로 확대되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판결문 공개 비율이 낮아 AI 인프라 구축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IT 전문 출판업체 한빛미디어 이사회의 박태웅 의장은 지난달 MBC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는 챗GPT 같은 인공지능 서비스를 만들 수 없다"며 "법률 분야에서는 판결문 공개 비율이 0.3%라 데이터 학습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 모델은 데이터 학습을 통해 다양한 결과물을 생성한다. 최근 정부는 이러한 AI 서비스를 공공부문에 적용해 국정 운영에 활용할 계획을 밝혔다.
AI 서비스를 구축하려면 충분한 데이터 확보가 중요한데, 사법 분야의 주요 데이터인 판결문이 거의 공개되지 않아 AI 구축이 어렵다는 게 박 의장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판결문 공개 비율이 0.3%에 불과하다는 말은 사실일까?
헌법(109조)은 재판의 심리와 판결을 원칙상 공개하도록 규정하면서, 다만 국가의 안전보장이나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선량한 풍속을 해할 염려가 있을 때는 법원의 결정으로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아놨다.
사법부는 이에 따라 '종합법률정보시스템'과 '판결서 인터넷 열람 제도'를 통해 인터넷으로 판결문을 공개하고 있다. 종합법률정보시스템은 무료로 판결문을 공개하고 있으나 대법원이 선례적 가치를 인정한 일부 판결만을 공개해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2019년 국회에서 열린 '판결문 공개 확대를 위한 국회토론회' 자료집을 보면, 과거 종합법률정보시스템을 통해 공개된 판결문은 전체 대법원 판결의 3%, 각급 법원 판결의 0.003%에 불과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판결문 공개 비율을 확대하라는 요구에 상응해 2019년 '판결서 인터넷 열람 제도'(이하 판결서 열람 서비스)가 도입됐다. 이를 이용하면 건당 수수료 1천원을 결제하면 비실명 처리된 확정 판결문을 열람·출력할 수 있다.
다만 공개되는 판결문의 범위는 2013년 이후 확정된 형사 사건 판결문과 2015년 이후 확정된 민사·행정·특허 사건 판결문으로 제한됐다.
연합뉴스가 법원행정처에 요청해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9~2022년 4년간 연평균 41만 건 정도의 확정된 민사·형사·행정 사건 판결문이 판결서 열람 서비스에 등록됐다. 이는 매년 전국 법원에서 선고하는 민사·형사·행정 사건 전체 판결(조정·화해·취하 등 포함)의 약 30%에 해당한다. 세분화해서 보면 민사 판결의 평균 19%, 형사와 행정 판결의 60% 이상에 해당한다.
이는 전체 판결 중 확정판결과 거의 일치한다. 확정판결 사건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판결문이 공개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춰보면 우리나라 판결문 공개 비율이 0.3%에 불과하다는 박 의장의 언급은 2019년 '판결서 인터넷 열람 제도'가 도입되기 이전 상황을 지적한 것으로 현 상황에 부합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표] 2019~2022년 민사·형사·행정 사건의 전체 판결 건수와 판결서 인터넷 열람 서비스에 공개된 판결 건수(판결 공개 건수의 전산 추출 일자: 2023.1.26.)
*전체 판결 건수: 민사·형사·행정 사건의 본안 사건 처리 건수(조정·화해·취하 등 포함)로, 확정되지 않은 판결을 포함. [※법원행정처 회신 자료, 사법연감(2021), 통계월보(2022) 참조]
판결서 열람 서비스를 통해 이전보다 많은 판결문이 공개되지만 판결문에 대한 접근성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판결서 열람 서비스 이용에 제약이 많기 때문이다.
판결서 열람 서비스에 접속해 개인정보를 입력하면 사건번호나 키워드를 통해 판결문을 검색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 한 번에 검색할 수 있는 기간은 2년으로 제한되며 판결문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미리보기 글자 수도 800~900자(공백 포함)로 제한된다.
사건을 키워드로 검색했을 때 결과가 부정확한 경우도 더러 생긴다. 예를 들어 '살인'을 검색하면 관련된 형사사건 외에 '제 나이가 몇 살인데'처럼 잘못된 결과물을 내놓기도 한다.
검색 기능에 제한이 있다 보니 판결문의 정확한 연도나 사건번호를 모르는 사용자는 여러 차례 검색을 반복해야 한다. 수수료를 내면 판결문 전문을 열람할 수 있지만 찾고자 하는 판결문이 아니거나 여러 판례를 참조해야 하는 경우 다른 판결문을 구매해야 한다. 이는 사용자의 비용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서선영 변호사는 "자본이 있는 기업이나 법률 사무소에서는 민간에서 운영하는 유료 판례 검색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지만 일반 국민들은 그러기 쉽지 않다"라며 "판결문은 공적인 집적물인데 지불 능력에 따라 접근성에 차이가 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판결문을 이미지 형태로 제공하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판결서 열람 서비스에서 제공하는 판결문은 이미지 형태의 PDF 파일로 텍스트 변환과 기계 판독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텍스트를 음성으로 변환하는 서비스(Text-to-Speech·TTS)가 필요한 노약자나 시각장애인의 경우 법원에 판결문을 따로 신청해야 하는 이중의 제약이 따른다.
기계 판독이 불가능한 판결문의 형태는 사법 분야에서의 AI 인프라 구축을 가로막는 요인이기도 하다. 한국경찰법학회의 2021년 논문 '사법분야 인공지능 발전을 위한 판결문 데이터 개선방안'(박성미)에 따르면 현재 공개된 판결문의 90% 이상은 기계가 읽을 수 없어 인공지능 학습을 위한 데이터로서의 가치가 없다. 사법부는 2021년 7월 '전자우편 등을 통한 판결문 제공에 관한 예규' 개정 이후 기계 판독이 가능한 판결문을 제공하기 시작했지만 개정 이전의 판결문에 대해서는 소급 적용되지 않아 한계가 있다.
미국은 원칙적으로 연방대법원의 판결문을 선고 후 24시간 이내에 법원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한국경찰법학회의 논문에 따르면 미국은 판결문을 비롯한 모든 법정 기록을 통상적으로 공개하며 정부 차원에서 법률 데이터의 연구 목적 사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일부 선별된 판결을 대법원 홈페이지에 무료로 제공하고 있으며 상업적 목적일 경우에만 수수료를 부과한다. 공개된 판결문은 모두 기계 판독이 가능하다.
판결문은 일반 국민들이 재판에서 방어권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기본 자료에 해당한다. 사법부는 올 1월부터 민사·행정·특허 사건의 경우 미확정 사건의 판결문도 열람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판결문 공개 범위를 확대했지만, 낮은 접근성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여전하다.
한국법제연구원의 '2021년 국민법의식조사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통해 법 정보를 얻는 국민 비율은 증가했으나, 법원의 법령·판례 검색시스템을 통한 법 정보 접근성은 판결서 열람 서비스가 도입된 2019년에 비해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법원 사이트를 활용해 법 정보를 얻는 비율은 학력과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함께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판결문을 공개하고 이를 데이터화하면 전직 판사나 검사 출신의 변호사가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전관예우를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판결문 공개 확대를 위한 국회 토론회' 자료집에 따르면 한상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판결문 공개 확대가 법 집행 과정에서의 부패와 권력의 남용 등을 방지할 것으로 분석했다.
법원행정처는 판결문 공개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예산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판결서 열람 서비스에 검색 기한이나 미리보기 자수 등 제한을 둔 것은 시스템 부하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며 "현재 이미지 파일로 제공되는 파일을 기계 판독이 가능한 형태로 변환하고 서버를 확충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예산 지원이 선행되어야 한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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