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여성 직장인, 판타지와 현실 사이
#지난해 한 대기업 여성 임원 A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단 한 번 만난 사이였지만 A는 대뜸 “좋은 기사를 써 줘서 고맙다”고 했다. 국내 대기업 여성 임원 비중이 6.3%에 그쳐 애플(23%) 등 해외 기업에 미치지 못하고, 인재풀도 모자라다는 기사를 쓴 직후였다. 그가 임원에 오르기까지, 또 오른 후에 겪었을 애환이 궁금했지만 하필 이동 중이라 다음을 기약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A가 있던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석 달 전 알게 된 재계 10위권 기업의 부장 B는 보기 드문 ‘경단녀’(경력단절여성) 출신이다. 출산·육아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지내다, 박근혜 정부 시절 여성 대통령 취임에 맞춰 일부 기업이 마련한 경단녀 재취업 프로그램으로 일터에 복귀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들어왔던 동기 일부는 이런저런 이유로 회사를 떠났다. B는 “내가 혜택을 받았던 재취업 프로그램도 금방 없어져 경단녀 출신 후배도 거의 없다”고 전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낸 건 최근 경단녀나 여성 직장인이 등장하는 드라마 여럿이 동시에 화제여서다. 대학교수 부인이자 청담동 며느리로 살다 출산·육아로 포기했던 일에 20년 만에 복귀한 46세 여성의 고군분투기(닥터 차정숙), 숨 막히는 일상을 견디다 은행에 경단녀 재취업을 한 부잣집 사모님의 일탈(종이달), 재벌가 오너리스크 관리를 진두지휘하던 여성 대기업 전략기획실장의 변신(퀸메이커) 서사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동시대 욕망을 반영하는 게 드라마라더니 이런 드라마 덕에 기업과 사회 곳곳에서 만난 여성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자신을 무시하던 남편·아들과 같은 일터에서 일하며 한방 먹이고, VIP 고객 마음을 척척 얻어내고, 해당 분야 귀재로 인정받는 게 판타지만은 아니었으면 해서다.
하지만 현실은 이어지는 황금연휴에 아이들 학교·학원 등은 쉬는데 직장에는 나가야 해서 발을 동동거리는 이들 쪽에 가깝다. 겨우 어느 지위에 오를 즈음엔 인맥 관리나 사내 정치에 자리에서 밀려나기도 한다. 요즘 같은 경기 침체기엔 구조조정 명단에 더 쉽게 오르내린다.
합계출산율 0.78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경단녀 복귀와 여성 직장인 성공기는 많아져야 한다. 출근 시간과 재택 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육아기 자율근무제’(LG디스플레이), 남성 육아 휴직 의무제(롯데)도 일부 대기업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한다. 그런 사례가 흔해져야 지금의 여성 직장인 판타지 드라마가 재미없어지는 날도 온다.
백일현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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