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의 시인이 사랑한 단어] 이수명, 물류창고
현관문 앞에 택배가 도착한다. 플라스틱 용기로 포장된 한 끼가 도착할 때도 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서도 내게 필요한 물건을 산다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익숙해졌다는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마저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테이프를 뜯어낸 종이상자와 스티로폼 상자, 헹궈낸 플라스틱 용기들을 양손 가득 챙겨 들고 분리수거함으로 간다.
핸드폰 어플을 켜고 장을 본다. 검색어를 입력하고 이미지와 상세정보를 대략 훑으며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는다. 삼만원을 채우면 배달료는 무료가 된다. 20분이면 커다란 비닐에 담긴 생필품이 현관문 앞에 배달된다. 이 물건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쓸데없이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쓸데없는 궁금증이므로 알려 하지 않는다. 알려 하지 않으니 영영 미지의 장소로 남게 될 것이다. 물류창고에서 올 것이다. 물류창고 직원이 되지 않는 한 그곳을 가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수명의 시집 『물류창고』에는 ‘물류창고’라는 제목으로 10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시적이고 미적인 것들을 제외하는 방식으로 시를 써온 시인의 선택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장소이다. 비시적이고 비미적이라는 것, 비인간적이라는 뜻과 거의 닮은 듯도 하다. 비인권의 위협 속에 노출된 택배노동자의 삶이 우리 사회의 딜레마가 되어 있는 지금, 한 시인이 ‘물류창고’라는 장소를 시에 호출하고 있다.
물류창고에도 벽시계는 걸려 있을까. 공기는 괜찮을까. 창문은 있을까. 조도는 어떨까.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닌 세계, 거기로부터 물건을 매일 받아 사용하지만 가본 적은 없는 세계, 없어져도 옮겨가도 모를 세계. 경험해본 적 없이도 엄연한 세계. 아니, 엄연해 보이는 세계. 앎과 무관하게, 체험과 무관하게 엄연한 상태인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엄연해 보이는 정도만으로도 우리를 이룬 것들에 대한 생각이 시작된다. 둘러보면, 모든 게 그렇게 보이기 시작한다.
김소연 시인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박은빈, 30살 먹고 울고불고…송혜교 배워라" 김갑수 막말 논란 | 중앙일보
- 그 흔한 외식 한번 없었다, 일기장에 비친 노인의 70년 | 중앙일보
- "욕실까지 금" 소문도…40년전 67억 쏟은 '그분'만을 위한 곳 | 중앙일보
- 지수·안유진이 취했다…'초통령 술방' 본 8살 아들 충격 질문 | 중앙일보
- "누구에게 받아야 할지…" 고 서세원 빈소에 찾아간 채권자 | 중앙일보
- [단독] "러 한복판 北노동자 활개" 北, 대놓고 외화벌이 나섰다 | 중앙일보
- "음식 먹다 질식사할 수도"…'백 투 더 퓨처' 스타의 투병 고백 | 중앙일보
- 3년전 '윈지 사태'보다 더하다? "박시영 공천 손떼라" 野 들썩 | 중앙일보
- "신입생 때리고 성기 잡았다"…무서운 운동부 '중2 선배' | 중앙일보
- 속옷만 입은 래퍼 깜짝…송혜교·제니도 간 '메트 갈라' 뭐길래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