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의 시인이 사랑한 단어] 이수명, 물류창고

2023. 5. 3. 00:3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소연 시인

현관문 앞에 택배가 도착한다. 플라스틱 용기로 포장된 한 끼가 도착할 때도 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서도 내게 필요한 물건을 산다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익숙해졌다는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마저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테이프를 뜯어낸 종이상자와 스티로폼 상자, 헹궈낸 플라스틱 용기들을 양손 가득 챙겨 들고 분리수거함으로 간다.

핸드폰 어플을 켜고 장을 본다. 검색어를 입력하고 이미지와 상세정보를 대략 훑으며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는다. 삼만원을 채우면 배달료는 무료가 된다. 20분이면 커다란 비닐에 담긴 생필품이 현관문 앞에 배달된다. 이 물건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쓸데없이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쓸데없는 궁금증이므로 알려 하지 않는다. 알려 하지 않으니 영영 미지의 장소로 남게 될 것이다. 물류창고에서 올 것이다. 물류창고 직원이 되지 않는 한 그곳을 가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이수명의 시집 『물류창고』에는 ‘물류창고’라는 제목으로 10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시적이고 미적인 것들을 제외하는 방식으로 시를 써온 시인의 선택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장소이다. 비시적이고 비미적이라는 것, 비인간적이라는 뜻과 거의 닮은 듯도 하다. 비인권의 위협 속에 노출된 택배노동자의 삶이 우리 사회의 딜레마가 되어 있는 지금, 한 시인이 ‘물류창고’라는 장소를 시에 호출하고 있다.

물류창고에도 벽시계는 걸려 있을까. 공기는 괜찮을까. 창문은 있을까. 조도는 어떨까.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닌 세계, 거기로부터 물건을 매일 받아 사용하지만 가본 적은 없는 세계, 없어져도 옮겨가도 모를 세계. 경험해본 적 없이도 엄연한 세계. 아니, 엄연해 보이는 세계. 앎과 무관하게, 체험과 무관하게 엄연한 상태인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엄연해 보이는 정도만으로도 우리를 이룬 것들에 대한 생각이 시작된다. 둘러보면, 모든 게 그렇게 보이기 시작한다.

김소연 시인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