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아빠의 얼굴에서 아이를 보게 된 순간
아빠와 아이
작년 어버이날 할머니의 부고 전화를 받았다. 딸만 셋인 우리 가족은 ‘머니 건’을 쏘며 한바탕 웃은 뒤 엄마가 준비한 진수성찬 앞에서 막 젓가락을 들던 참이었다. 전화를 끊은 아빠는 건조하게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몇 숟갈을 더 뜬 뒤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맨발이었다. “아빠, 양말 신어야지.” 우리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이따 연락할게. 밥 먹고 있어”라고 말하며 집을 나섰다. 쿵쿵대는 발소리만 문밖을 울렸다. 남겨진 우리 넷은 어안이 벙벙했다. 밥을 먹어도 되는 건지, 이대로 기다려야 하는 건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이따 연락한다는 말은 뭔지 전부 헷갈렸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할머니가 이미 돌아가신 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소식을 들은 지 5년은 넘은 것 같았다. 당시에 “그냥 알고는 있어라”고 했던 아빠의 말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아가셨다니? 엄마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작은아빠가 일부러 이야기를 안 한 거였어. 나도 돌아가신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지난주에 연락이 왔더라고. 사실 요양원에 계셨는데 위독하시다고. 바로 가서 뵙고 왔지. 너희에게는 오늘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몰랐네.” “작은아빠는 왜 말을 안 한 건데?” 우리는 물었고, 엄마는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게를 집었다. 배가 고팠다. 사실 큰 타격도 없었다. 할머니는 우리와 만난 적이 거의 없으니까. 내가 기억나는 것만 해도 두 번이나 되려나? 아마 아빠의 가정사 때문일 거라고 짐작한다.
할머니는 가난 때문에 어린 아빠를 둔 채 집을 떠났고, 다신 찾지 않았다. 아빠는 스무 살이 되고 나서야 친척들을 수소문해서 어머니를 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새살림을 차리고 아들을 낳은 어머니를 만났다. 아빠는 훗날 우리에게 그 여정을 들려주며 어머니를 만나서 기뻤다고 했으나 글쎄, 할머니는 아빠에게 혈육을 찾은 것 이상의 기쁨이나 애정을 주지는 못한 것 같다. 그게 버려졌다는 상처 때문인지, 아니면 나중에라도 찾지 않았다는 원망인지,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를 미워하기보다 아빠를 미워했다. 내가 기대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아빠였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내가 애정을 갈구한 대상이 아니었기에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빠는 아니었다. 어릴 땐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주말이면 함께 놀러 가줄 아빠를 바랐지만 기대는 늘 버려졌다. 머리가 조금 큰 후에는 폭군 같은 아빠가 차라리 우리를 버려주길 원했지만, 그 또한 좌절됐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이후에는 ‘어른이니까’라는 말로 과거를 봉합한 채 겉으로 보기엔 별문제 없는 가족의 모습을 만들고자 애썼던 것 같다. 다른 가족들도 동참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설픈 봉합은 틀어지기 일쑤였다. 가족 모임 때마다 과거의 일을 들먹이며 갑자기 폭발해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몇 시간 뒤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작은아빠를 만날 수 있었다. 네다섯 살 때 봤던 작은아빠의 딸 나희는 벌써 스무 살이라 했다. 키가 나보다 컸다. 빈소 앞 안내 화면에는 할머니의 이름과 함께 이복형제인 아빠와 작은아빠, 상주 두 명의 이름이 띄워져 있었고 그들의 자녀인 우리 이름도 나란히 적혀 있었다. 신기했다. 호적에 없는 자식 이름도 올라갈 수 있구나. 아빠가 어릴 때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몇 년 뒤 할머니는 아빠와 할아버지를 떠났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출생신고도 하지 못한 때였다. 아빠는 우여곡절 끝에 작은할아버지 호적에 이름을 올렸다. 공식 서류에서 아빠는 작은할아버지의 아들일 뿐 할아버지의 아들도, 할머니의 아들도 아니었다.
사진 속 할머니는 예뻤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향을 피우고 절을 한 뒤 미리 와 있던 친척들 속에 숨어들었다. 할머니가 죽고 나서야 만나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말없이 반찬만 집어 먹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속이 답답했다. 조문객은 많지는 않았으나 적은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술을 거나하게 마시거나 음식을 입에 넣고 질겅거리면서 비슷한 말을 했다. “네가 부모 복은 없어도 자식 복은 있다”고.
내 책이 잘됐다는 말을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들은 한 마디 더 얹었다. “둘째가 베스트셀러 작가라며. 이제 넌 걱정할 것 없다(왜죠).” 나는 그 말이 전부 싫었지만, 미소 짓는 아빠가 제일 싫었다. ‘그럼 부모 복 없는 우리 셋은 뭔 죄지. 그리고 내가 어떤 책으로 베스트셀러가 됐는지 저 사람들은 모를 거야. 그러니까 저렇게 말할 수 있겠지.’
결국 발인 전날 밤 급격히 몸이 좋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에 다시 돌아가야 했지만, 가고 싶지 않았다. 애정 없는 이의 장례식이기도 했고 사람들을 보는 것도 지쳤지만, 호적에도 없고 할머니의 마지막에도 없던 아빠의 기구함을 보는 게 제일 지겨웠다. 나는 연민을 지우고자 그의 악행을 잔뜩 떠올리며 밤새 앓았다. 그 핑계로 발인 때 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는데, 관 옮길 사람이 부족할 것 같으니 자신도 들어야겠다고 말하는 애인을 보며 폭발할 지경이 됐다. “관 옮기는 것까지 네가 왜 신경 써! 그리고 발인까지 갈 필요도 없어!” 소리를 지르자 애인은 “아버님 표정을 보니까 안 가면 안 될 것 같아”라고 했다. 애인은 자신을 버렸던 부모를 영영 보내는 마음을 상상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악몽을 잔뜩 꿨다.
결국 오전 일찍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애인의 예견대로 시신을 운구할 사람이 필요했다. 아빠는 상조 회사 직원의 말에 따라 관 앞에서 할머니의 영정을 들고 있었다. 화장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아빠가 내게 말을 걸었다. “장례식장 준비하는 데 돈 많이 들었거든. 그거다 어떻게 갚나 싶었는데, 조의금이 많이 들어와서 적자는 면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다행이네.” “사람들이 부모 복은 없어도 자식 복이 있어서 다행이래.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너희 잘 컸다고 전해드렸어. 연로해서 말은 못 해도 우시더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전 10시 30분, 직원의 안내에 맞춰 발인이 진행됐다. 우리는 관을 운구하여 화장터로 들어갔다. 우리는 할머니와 관이 화장되기 전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쿵! 문이 닫히고 화장이 시작됐다. 최소 한 시간 이상 걸린다고 했다. 다들 자리에 앉아 문이 닫힌 그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 움직임도 없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렇게 했다. 작은아빠와 나희는 눈물을 터뜨렸다. 할머니와 꽤 오래 같이 살았다고 했다. 나는 문득 아빠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빠는 소리 없이 펑펑 울고 있었다. 거친 피부 위로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표정은 잔뜩 찡그린 채였다.
모르겠다. 왜 그 모습이 아이처럼 보였는지는. 왜 거기서 뚝 끊겼던 내 마음이 흐르게 됐는지. 아빠의 얼굴은 분명 주름 가득한 60대인데 소리 없이 엉엉 우는 얼굴은 예전에 할머니를 잃어버렸던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잃음은 예전과 다르다. 영원히 잃은 것이다. 그렇게 아이인 상태로 아빠는 처음 해보는 장례식을 준비하고, 상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 잃음이 너무 슬퍼 보여 매번 공격하고 싶었던 아빠의 얼굴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몸으로 느꼈다. 그에게도 엄마가 있었지. 버려졌고, 다시 찾았고,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던. 나처럼 미움과 원망, 사랑이 똘똘 뭉쳐 있었을. 그러나 이제는 그녀와 그 감정들까지 알 수 없는 곳으로 영영 보내야 하는. 그것은 과연 내가 상상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마음이었다.
납골당 자리는 내 키 높이의 좋은 자리로 배정됐다. 직원은 고인을 위한 마지막 기도를 올리라 했다. 난 그제서야 처음으로 기도했다. ‘할머니, 편히 쉬세요. 그리고 우리가 더는 슬프지 않게 해주세요.’ 슬픔은 꼬리가 길다. 먼 옛날부터 이어진 꼬리가 결국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옛날이 슬퍼서 자꾸 화를 내고 아빠 역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슬프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역시 그러길 바랄 것이다.
백세희
10년 넘게 겪은 경도의 우울증을 솔직하게 써 내려간 에세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로 베스트셀러 작가에 등극했다. 내 마음을 돌보는 일만큼 동물권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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