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후원하고, 기증하고… 중국 현대미술 알린 슈퍼 컬렉터
형광빛 주황색에 붙은 선명한 줄무늬로 봐서 건설현장 인부들이 입는 안전조끼를 재료로 사용한 것 같은 설치 작품이다. 그런데 안전조끼는 제 옷이 아닌 다른 옷과 지퍼로 연결돼 있다. 그래서 마치 “더는 국가를 믿지 못하니 우리끼리 안전을 위해 연대하자”고 외치는 듯하다.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송은(구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스위스의 슈퍼 컬렉터 울리 지그(77·사진)의 중국 미술 컬렉션을 선보이는 ‘울리 지그 중국 현대미술 컬렉션전’을 한다. 울리 지그 컬렉션을 한국에서 이처럼 대규모로 선보이기는 처음이다.
로비에서부터 동선이 시작되는 이 전시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의 시선을 끄는 아이웨이웨이의 안전 조끼 작품은 울리 지그 컬렉션을 선명하게 요약하는 상징 같다. 아이웨이웨이는 천안문광장을 향해 작가가 가운데손가락을 올린 포즈를 찍은 사진 작품 등 정치적인 작품을 잇달아 제작하며 중국 당국으로부터 구속된 전력이 있다. 지그는 이처럼 1980년대 이후 중국 현대미술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했다. 중국 현대미술 컬렉션으로는 세계 최대이며 가장 포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지그는 중국 합작법인의 비즈니스맨으로 출발해 중국 주재 스위스대사를 지내던 1980년대 중국에서 작품을 수집했을 뿐 아니라 컬렉션의 3분의 2인 1500여점을 2012년 홍콩의 M+뮤지엄에 통크게 기증해 화제가 됐다. 이는 투자가 아니라 기증을 위해 작품을 수집했다는 자신의 철학을 실천한 것이기도 했다. 지그는 또 1997년 중화권에 거주하는 중국 현대미술가를 지원하기 위해 중국현대미술상(지그상)을 제정했다. 지그는 전설적인 큐레이터인 하랄트 제만에게 중국 현대미술을 소개했고 이에 영향을 받은 제만이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여러 중국 작가를 선보이며 서구 미술시장에서 중국 미술 돌풍을 이끌었다.
지그가 처음 중국 미술 작품을 수집하던 1980년대는 마오쩌둥 사후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펴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가 분출하던 시기였다. 지그는 격동의 중국 현대사를 작품 속에 압축적으로 녹여냈다면 작가의 지명도라든가 크기, 값을 따지지 않았다.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라고 판단되면 무명작가의 작품도 사들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중국현대미술의 산 증인’ ‘오늘의 중국현대미술을 있게 한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정작 그는 “누구도 관심을 안 가질 때 중국현대미술을 만나, 원하는 작품을 마음껏 수집했으니 최고의 행운아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지그는 2000명에 가까운 중국 작가들을 만났다. 당시에는 중국 미술계에 화랑이 제대로 존재 하지 않아 작가들에게서 직접 작품을 구입했다. 그가 중국 작가들과 맺은 우정은 그들이 그려준 울리 지그 부부의 초상화가 증명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 초상화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전시는 지그의 컬렉션을 주제별로 묶어 선보이는 방식을 취했다. 전시는 로비의 설치 작품에 이어 2층 ‘순수 회화-추상을 향하여’, 3층 ‘신체-여성의 복수’와 ‘자연-동화된 장’, 지하의 몰입형 영상 작품으로 구성돼 있다. 설치, 영상, 조각, 회화 등 48점이 나왔다. 이를 통해 중국 현대미술 추상화의 흐름, 전통의 현대화 노력, 페미니즘 물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중국 현대미술의 현주소를 읽을 수 있다.
특히 지하에는 허샹위가 아이웨이웨이가 가택연금을 당하기 전 체포되던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을 선보이며 전시의 대미를 장식한다. 전시의 처음과 끝이 대구를 이루듯 아이웨이웨이로 장식한 것이 흥미롭다. 계단을 좌석처럼 이용해 영상을 보는 코너에서는 자오쯔양이 마오쩌둥 시절 시각장애인 소리꾼들을 정치적 선전 목적에 동원한 것을 비꼬듯 시각장애인들이 인권선언문을 전통적인 창법으로 노래하고 연주하는 작품을 볼 수 있다. 실을 먹에 담근 뒤 이를 캔버스에 찍는 방식으로 수묵의 현대화를 추구하는 구사오핑의 작품 등 미술 그 자체의 조형적 실험을 하는 작품에서부터 반체제적인 작품에 이르기까지 컬렉션의 스펙트럼이 넓다.
북한 주재 스위스 대사를 지내며 한국 현대미술에도 관심을 두게 된 지그는 2021년 스위스 베른미술관에서 가진 컬렉션 전을 통해 수집한 남북한 미술을 선보인바 있다.
송은아트스페이스는 세계적인 스위스 듀오 건축가 헤르조그 앤 드 뫼롱이 설계한 삼각형 외관으로 건축물 자체도 서울의 랜드마크가 됐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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