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 위에 그려진 박완서 글과 김점선 그림…영인문학관 ‘선면화’전
‘닭은 울지 않는다. 다만 빛을 토할 뿐이다.’
펼쳐진 흰 부채 왼편에 고(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쓴 글귀가 검은 붓글씨로 새겨져 있다. 글귀 바로 아래엔 아침의 빛을 뿜어내는 태양이, 오른편엔 빨갛고 화려한 닭 볏을 가진 검은 수탉이 자리했다. 화가 이석조(78)의 그림이다. 2002년 제작된 이 부채는 문학과 미술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한데 어우러지는지 잘 보여준다.
‘나에게 말을 몇 필 다오/올해의 첫 배가 갖고 싶소/아직 태어나지 않은 당신의 말 중/가장 순결한 말을.’ 소설가 박완서(1931∼2011)가 부채 위에 직접 쓴 이 글귀는 화가 김점선(1946∼2009)이 대담한 필치로 그린 붉은 말과 함께 더욱 돋보인다.
“생활 속에 스며든 예술의 경지”
부채 위에 그린 그림, 선면화(扇面畵)는 문학과 그림이 한 폭에 담긴 종합 예술이다. 시인·소설가, 화가, 서예가 등 약 100명의 예술가가 그린 선면화를 모은 전시 ‘바람 속의 글·그림 2023―영인 서화선 명품전’이 서울 종로구 영인문학관에서 이달 26일까지 열린다.(일·월요일 휴관)
이번 전시는 2016년 이후 7년 만에 열렸다. 변종하·천경자·서세옥·이종상·김병종 등 정상급 화가와 김동리·김상옥을 필두로 하는 원로 문인들, 김충현·김제인·송성용 등 정상급 서예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쓴 명품 서화선이 전시됐다. 전시 규모는 100여점 정도로 7년 전보다 작아졌지만, 예술적 가치와 개성이 담긴 명품 부채들을 엄선했다고 영인문학관 측은 밝혔다.
부채에 그림을 그린 것은 화선(畵扇), 글씨를 쓴 것은 서선(書扇)이라 부르는데, 시(詩)·서(書)·화(畵)가 하나로 융합되던 전통 사회에서 시작된 서화선(書畵扇) 장르는 생활 속에 스며든 최고 경지의 예술을 보여준다. 반세기에 걸쳐 부채를 수집한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은 “서화선 안에는 부챗살의 저항을 받으며 그어진 선과 색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동시에 부채 위에 쓰인 시는 제한된 지면 속에서 압축된 시적 표현이 더욱 빛을 발한다”고 말했다.
천경자·김상옥 등의 예술 세계 집약
화선에는 화가들의 미술 세계가 그대로 부채 안에 담겼다. 화가 천경자(1924~2015)가 그린 부채에는 파격적인 색채의 개구리들이 흰 공간을 가득 메웠다.
화가들의 부채가 '보는' 부채라면 문인·서예가들의 부채, 서선은 '읽는' 부채다. 제한된 지면에서 시의 한 구절이 빛을 발하고 소설의 특정 대목이 부각되며, 문학의 정수를 인상 깊게 각인시킨다.
동글동글한 한글로 지면을 채운 소설가 송영(1940~2016)의 부채는 글씨로도 그림이 그려질 수 있음을 실감케 한다. 서예가 김단희(82)의 한글 부채 역시 검은 한글 글씨 만으로 그림이 생겨나는 듯한 독특함을 뽐낸다.
문인 부채의 절정은 시조 시인 김상옥(1920~2004)의 작품이다. 김상옥은 자신이 좋아하는 명시들을 부채 위에 올렸다. 검은 먹과 시구가 혼연히 한몸을 이루면서 부채의 흰 면을 빼곡하게 채웠다.
강인숙 관장은 “중국과 일본에선 부채가 대량 생산돼 일상용품으로 사용됐지만, 우리나라에선 접선(摺扇·접었다 폈다 하는 부채) 자체가 고급화됐기 때문에 서화선의 예술화가 가속화됐다”고 말했다 “우리의 서화선은 중국에서도 인기가 있어, 중국 사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이기도 했다”면서 “한류의 고급 문화, 최상위 문화인만큼 우리 문화로서 개발하고 홍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영인문학관은 이어령 전 장관과 부인 강인숙 관장이 사재를 들여 2001년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설립한 문학 박물관이다. 명칭은 부부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들었다. 문학관에는 이어령 전 장관의 서재가 상시 전시되고, 기획전마다 특정 작가의 작품과 물건을 전시한 '작가의 방'이 꾸려진다.
이번 서화선 전시에 함께 하는 '작가의 방' 주인공은 4년 전 작고한 시인 추은희(1931~2019)다. 그의 손때 묻은 가구들과 집기들로 정열적인 시인 추은희가 살아 있었을 당시의 작업 공간이 재현됐다.
어환희 기자 eo.hwa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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