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진과 정정화 자료전시회
[김삼웅 기자]
▲ 지난 2013년 8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기획전 <조국으로 가는 길> 포스터. 정정화 일가의 사진이 붙어있다. 왼쪽부터 정정화의 남편 성엄 김의한, 가운데 여성이 수당 정정화, 콧수염이 있는 노신사는 시아버지 동농 김가진이다. 아이는 정정화의 아들로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이다. |
ⓒ 김경준 |
서울 관련 전시를 주로 해오던 서울역사박물관은 2013년 8월 광복절에 조금 색다른 전시를 마련했다. 한말 서울 백운동 일대에서 살았던 동농 김가진과 그 며느리 수당 정정화를 중심으로 하는 한 가족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개화기 지식인이자 관료였던 동농 김가진은 삼일운동 직후 지하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을 이끌었고, 74세의 나이로 대한제국의 대신으로는 유일하게 상하이임시정부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수당 정정화는 연로한 시아버지를 봉양한다는 일념으로 뒤따라 망명하여 26년여간을 임시정부의 안살림꾼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가진의 삶을 따라서는 일제에 나라를 다시 찾게 되기까지의 격동의 시대를, 그리고 정정화와 망명정부의 발자취를 따라서는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찾게 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독립된 조국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이들의 기나긴 여정은 조국이라는 터전 안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주석 2)
전시회에는 동농 김가진과 수당 정정화 관련 자료는 물론 독립운동사의 회귀 자료(사료) 수 백 점이 생생하게 전시되었다. 동농과 수당 관련 자료를 이처럼 많이 한 자리에 모아 전시한 것은 처음이었다.
▲ 김가진의 '독립문' 한글 글씨 |
ⓒ 김자동 |
〈독립문 현판 글씨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에는 "독립협회가 세운 독립문의 현판 글씨를 쓴 사람은 이완용이라고도 하고 김가진이라고도 합니다. 두 사람 모두 당시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당대의 명필로 꼽히는 인물로서 독립문 현판을 쓸 만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흥미로운 신문기사(188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가 있습니다.
김가진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당시 '독립문 먹'을 만들었는데, 앞면에는 도금된 한자로 '제국 독립문'이라 쓰고 뒷면에는 독립문 모양을 새겨 태극기와 '독립문'글씨에 도금을 했다고 합니다. 독립문에 대한 김가진의 남다른 애착을 알 수 있습니다. (주석 3)
김가진이 1910년(경술) 7월 8일에 지은 <솥 안의 물고기가 된 2000만 동포>란 시도 전시되었다.
망망한 우주에 허다한 사람 많은데
나라는 이때에 이 몸을 나게 했나
어찌 차마 이천만 동포를 보겠는가
하루 아침에 솥 안의 물고기 된 것을. (주석 4)
김가진의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각종 도화·서예·현판·인보, 망명기의 각종 희귀본이 전시되어, 시민들의 눈길을 끌어 모았다.
며느리 정정화의 자료도 많이 전시되었다. 백범 김구가 수당에게 써 준 휘호, 압록강 철교를 건너다 일경에 검거된 기사가 실린 <매일신보>, 1922년 6월 24일자, '삼일유치원 추계 개학사진' 1941년), <대륙을 떠도는 길고 긴 피난길>의 약도와 함께 수당의 다음의 글을 싣는다.
중국에는 쑤저우에서 낳고 항저우에서 살며 광저우에서 먹고 류저우에서 죽는 게 소원이라는 말이 있다. 쑤저우는 미인으로, 항저우는 풍경으로, 광저우는 요리로, 류저우는 관광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상하이에서 탈출 후 나는 이 4주를 다 둘러본 셈인데.
가는 곳마다 피난 짐보따리를 끼고 있었으니 어디서 먹고 어디서 살고 하는 따위를 따질 겨를도 없었을 뿐더러, 나라를 잃고 쫓겨 다니는 몸이었으니 오히려 그렇게 이름난 고장에 들를 적마다 더욱 가슴 아팠던 게 솔직한 심정이다. (주석 5)
1개월 간 유지된 전시회는 전문가의 특강이 마련되었다. 한홍구 교수의 동농의 생애를 살피는 <개화운동에서 독립혁명으로>, 언론인 김창희가 정정화의 생애 <내 나라에서 아침을 맞아>를 발표했다.
한홍구의 논문 마지막 부분이다.
다행히도 김가진의 삶은 그의 후손들에 의해 발전적으로 계승되었다.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은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동했으며, 며느리 정정화는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아 임시정부 요인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섯 차례나 국내에 드나들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김의한·정정화 부부의 아들 김자동은 통일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고, 김자동의 딸 김진현과 김선현은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한국의 근현대사의 큰 흐름을 보면 일본 제국주의가 친일파를 낳았고, 친일파가 군사독재를 낳은 반면, 그 반대쪽에서는 개화운동-독립운동-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대립해 왔다.
김가진과 그 후손들은 한 집안 내에서 한국 현대사의 큰 흐름의 한 축을 그대로 구현해 낸 것이다. 한 집안의 역사 속에서 이만큼 한국근현대사의 흐름을 온전히 보여주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주석 6)
주석
2> 강홍빈, <전시를 열며>, <조국으로 가는 길>.
3> 앞의 책, 39쪽.
4> 앞의 책, 47쪽.
5> 앞의 책, 86쪽.
6> 앞의 책,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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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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