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정권 망명중인 김대중, 김지하와 공동투쟁을 논의하다

장신기 2023. 5. 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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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도서관, 1973년 김지하가 김대중에 보낸 편지 공개... 반유신 민주화 투쟁 확인

[장신기 기자]

1973년 유신 정권 시절 망명 중이던 김대중이 국내에 있던 김지하와 반유신 민주화투쟁을 함께 논의했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은 2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김지하 시인 1주기(5월 8일)을 맞아 공개한 1973년 6월 김지하가 김대중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확인된다.

1970년대 초 김대중과 김지하가 교류를 했다는 사실은 알려진 바 있다. 그러나 반독재 민주화를 위한 공동투쟁을 함께 논의했다는 사실은 그동안 제대로 확인된 바 없었다. 특히 시점이 유신 선포 이후 김대중이 망명투쟁을 하던 때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이 기사에선 사료의 내용과 의미 그리고 1970년대 김대중-김지하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본다.

도청 피해 인편으로 편지를 주고 받은 김대중-김지하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 당시 일본에 있던 김대중은 귀국하지 않고 망명투쟁을 선언하며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반유신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김대중은 미국과 일본의 주요 정치인과 해외 한인들을 접촉하면서 유신정권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김대중은 국내와도 비밀리에 소통하고 있었다. 다만 국내 인사와의 소통은 도청과 감시로 인해서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내밀한 이야기의 경우 인편으로 편지를 주고 받는 방식으로 해야만 했다. 그리고 감시 및 수색 등에 있어서 비교적 자유로운 외국인이 그 역할을 했다.

그렇다 보니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대상은 극소수였고, 자주 하기는 어려운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그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망명 중인 김대중이 소통한 국내 인사는 현재 확인된 바로는 부인 이희호 여사가 있다. 그 외 인물이 더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는데 누군인지는 그동안 특정하기 어려웠다.
  
▲ 1973년 김지하가 김대중에게 보낸 편지 망명중인 김대중에게 김지하가 보낸 편지입니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그런데 이번에 공개한 자료를 통해서 망명 중인 김대중이 김지하, 함석헌, 박형규 등과 논의를 했다는 것이 확인됐다. 김대중은 1973년 봄에 김지하, 함석헌, 박형규 등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고 이들은 이에 대한 답신을 써서 1973년 6월에 가이가 여사(미국인으로 추정되며, 영문 스펠링은 Geiger 혹은 Geigar)를 통해 당시 미국에 있던 김대중에게 전달했다.

인편으로 전달된 것이므로 편지봉투에는 우표 등이 없으며 함석헌, 김지하, 박형규의 영문 이니셜 S.H.H, C.H.K, H.K.P 등이 수기로 적혀 있다. 김대중이 국내로 보낸 편지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래도 다행히 김지하 등이 보낸 편지는 남아 있었다. 김지하의 편지는 200자 원고지에 작성됐고 총 6장인데 그 중에서 네 번째 장은 현재 전하지 않아서 총 5장이 남아 있다.
  
1973년 김지하, 김대중에게 이렇게 말하다

그러면 이 편지의 전문을 살펴보도록 하자.
 
김대중 선생께
 
보내주신 편지 뜨거운 마음으로 받아 읽었읍니다. 부탁하신 분들게 모두 선생의 뜻을 전했읍니다. 그쪽에서의 선생의 활동, 우리에게 퍽 고무적이고 또 제가 늘 바라는 바대로입니다. 특히 교포들의 현 정권관의 급속한 변화는 매우 중요한 영향을 앞으로의 운동에 미칠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월 20일자로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이 나왔읍니다. 본격적인 반박 운동의 신호탄으로 생각되는데 곧 지주교의 힘이 그쪽에 합세할 것입니다. 최소한 올가을 유엔총회 전후한 시기엔 군중행동의 제1파를 일으킬 작정입니다. 힘이 닿는한 각계층의 연합을 시도할 것입니다. 그쪽에서의 행동도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길이 있는대로 광주와 목포 등지의 양김기반을 상기한 움직임에 가세토록 힘을 넣어주십시오.

고대 김낙중 교수와 몇몇 노동운동하는 친구들이 스파이사건조작에 걸려들어갔읍니다. 전혀 날조이고 증거불충분으로 검찰에서 아직도 공표를 못 (중략 : 4페이지 현전하지 않음) 접촉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지주교에 대한 미일측의 지지를 강화해주십시오.

빌리 그라함의 부흥회로 박에 대한 세계여론이 주춤할 기미가 있으니 반박 프로파를 강화하십시요. 빌리의 경우 부흥회 주최와 참가자를 사전 조사했으며 군중집회가 폭동으로 발전할 것을 두려워해서 박이 빌리를 맞아 융숭한 대접을 했으며 현장에는 서울의 전 경찰기동력을 집결시켰읍니다. 자유로운 나라라는 인상을 주기위한 조작입니다. 지주교의 인사를 대신 전합니다. 지주교는 죽을 각오를 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건투를 빕니다. 6월 4일
 
 
▲ 김지하가 김대중에게 보낸 편지 5장 김지하가 김대중에게 보낸 편지 5장입니다. 원래 6장인데 한장은 전하지 않습니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김지하의 편지 내용을 보면 김대중은 해외에서의 자신의 활동을 소개하고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알린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김지하는 김대중의 활동 방향에 동감을 표시하면서 국내 동향을 전하고 있다. 이 편지는 유신 정권 초기 한국 민주화운동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김대중에게 보낸 김지하의 편지, 역사적 학문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첫째, 김대중과 김지하는 잘 아는 사이였다. 1973년 4월 미국에서 발간된 김지하의 시집 '오적과 비어'에 김대중이 추천사를 쓰기도 했고 추천사의 내용을 보면 유신 선포 직전에 동교동 자택에서 김지하와 하루를 같이 보내면서 나눈 이야기를 소개하는 부분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관계였던 김대중과 김지하는 유신 정권 시절 국제적으로 한국 민주화와 인권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던 인물들이다. 이러한 두 인물이 유신 정권 초기 반유신 투쟁을 위한 논의를 진행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둘째, 김대중은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반유신 민주화 국제연대 구축을 위해 노력했으며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김대중은 국내 민주세력과 소통하면서 연대투쟁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사료를 통해서 새롭게 확인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그 대상이 모두 재야 인사라는 점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김대중은 이때부터 재야 인사들과의 연대를 강화해서 반독재 민주세력의 총연합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김지하는 "최소한 올가을 유엔총회 전후한 시기엔 군중행동의 제1파를 일으킬 작정입니다. 힘이 닿는한 각계층의 연합을 시도할 것입니다. 그쪽에서의 행동도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 필요합니다"라고 썼는데 이는 두 가지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먼저 김지하는 민중시위가 나올 수 있도록 자신이 역할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계엄령 선포와 함께 시작된 유신체제 초기에 국내에서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각종 저항운동이 크게 위축돼 사실상 암흑 상태에 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김지하는 1973년 5월 20일 나온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을 시작으로 반유신 투쟁이 서서히 본격화될 것이라고 진단하면서 이보다 진전된 형태의 군중집회가 나올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김지하는 이것을 김대중의 망명투쟁 활동과 연계해서 접근했다. 해외투쟁과 국내투쟁의 결합은 망명투쟁 당시 김대중의 운동 전략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김대중과 김지하는 이 점에서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대중이 1973년 8월 납치테러 사건을 당하지 않았다면 김대중-김지하 연대는 큰 위력을 발휘했을 수 있다.

또한 김지하는 '각계층의 연합'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민주화운동 시기 김대중의 민주화 이행 전략인 반독재 민주화 총연합노선과 일치하는 정치적 견해다. 이 사실을 통해서도 보면 김대중과 김지하는 민주화 투쟁 전략에 있어서 상당히 비슷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이 편지는 여러 각도에서 역사적 학문적 가치가 매우 크다. 특히 1970년대 민주투사 김지하의 면모를 재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고 판단된다. 

유신 정권 시절, 해외에서 한국 민주화를 상징하는 '양김'은 김대중과 김지하였다
  
김대중과 김지하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맞선 대표적인 민주인권투사로서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다. 공교롭게도 두 인물이 모두 크게 알려지게 된 시점은 1970년이다. 김대중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된 이후부터, 김지하는 '오적'을 발표한 이후부터 그렇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신 정권 시절 두 인물에 대한 각종 인권유린은 공분을 일으키면서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하는 유신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국제적으로 확산되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유신 정권 시절 해외에서의 한국 민주화를 상징하는 양김은 김대중과 김지하였다.

김대중은 김지하를 높이 평가했다. 김대중은 망명 중인 1973년 4월 미국에서 발행된 김지하 시집에 추천사를 썼다. 이 글을 보면 김지하에 대한 김대중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 1973년 미국에서 발행된 김지하 시집 1973년 미국에서 발행된 김지하의 시집입니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김지하의 시는 다른 어떤 시보다도 우리의 가슴을 치고 피를 끓게 한다. 그의 시 정신이 서민의 분노와 슬픔과 비통을 대변하는 바로 우리들의 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시는 국악의 판소리와 그 음을 같이 하고 있어서 더욱 한국적이요, 서민적이다. 가장 한국적인 그의 시가 지금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노벨문학상의 후보 작품으로까지 이야기되고 있음은 기이하면서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김지하는 백년 천년을 두고 얻기 어려운 민족의 시인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김지하를 가장 높이 평가하고 존경한 것은 그의 문학적 재질만이 아니다. 김지하의 대중을 사랑하는 불같은 애정 - 그리고 이를 과감히 표현하는 생명을 건 용기이다. 또한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정열의 시인답지 않은 냉정한 판단력과 양식에 넘쳐흐르는 정치 감각, 그리고 쉬지 않는 행동력이다. 나는 지금도 작년 계엄령 직전의 어느 날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그와 여러 가지 문제를 이야기하던 때의 나의 그에 대한 감동과 경의가 생생하다. 그는 과거와 현재에만 위대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욱 위대해질 것이며, 그의 위대는 서민 대중과 영광을 같이하는 위대인 것이다.
 
  
이처럼 김대중은 김지하 시인을 높이 평가했다. 그렇기 때문에 해외에서 망명 투쟁을 하면서도 국내에 있는 김지하에게 연락을 취해서 반유신 민주화 투쟁을 함께 논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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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 연구자입니다. 김대중 재평가를 위한 김대중연구서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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