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美 힘의 기둥 '페트로 달러' 흔드는 사우디
"‘페트로 달러(Petro dollar)’ 체제가 중대 위기에 놓여 있다"
50여년간 세계 금융 질서를 지탱해 온 페트로 달러가 사우디아라비아의 변심과 중국의 부상이라는 도전 속에서도 안정된 독주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까. 달러 패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우디에 강경 일변도였던 미국이 대응 수위를 한층 낮춘 가운데, ‘페트로 위안’의 부상이 달러 위상을 위협하는 변수로 떠올랐다.
미국 힘의 기둥 ‘페트로 달러’를 흔들다
1973년 10월17일 제1차 오일쇼크가 터지고 한 달 뒤. 리처드 닉슨 미국 행정부의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은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의 파이살 국왕을 접견해 훗날 세계 질서를 뒤바꿀 ‘세기의 거래’를 성사시켰다.
이스라엘과 아랍권에서 발생한 욤키푸르 전쟁에서 이스라엘 편에 선 미국에 사우디가 원유 공급을 중단하자 패닉 바잉(공황 매수) 속 유가는 4배 넘게 올랐고, 달러 가치는 30% 가까이 추락한 시점이었다.
미국은 기축통화로서 달러 패권을 지키기 위해 묘수를 짜냈다. 미국이 사우디의 안보를 보장하는 대신 사우디는 원유거래 대금을 오직 달러로만 결제하는 데 합의한 것이다. 훗날 달러를 대체 불가능한 글로벌 기축통화로 만들어 준 페트로 달러 체제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50년이 지난 현재 미국과 사우디 간의 관계에서 균열이 생기고 있다. 페트로 달러 체제를 만들고, 그 중심에 섰던 사우디가 최근 탈(脫)달러로 돌아서고 있는 것이다.
양국 관계가 뒤틀리기 시작한 건 2018년 10월 사우디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이 계기가 됐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카슈끄지 암살의 배후로 사우디 왕세자인 빈살만을 지목했고, 2019년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사우디 왕정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압박하면서 오랜 우방 관계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집권 후 예멘 내전에서 사우디에게 큰 위협인 후티 반군의 미사일 공격에 직면했을 때도 사우디에서 패트리어트 지대공 미사일을 철수했다. 이후 2021년 8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을 철수하며 중동과 거리두기를 본격화했고, 사우디의 안보 보장도 약화됐다.
미국과 사우디 간의 관계가 멀어지는 듯하자 사우디는 기존과 다른 결정을 내렸다. 사우디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총력전에 나선 미국을 아랑곳하지 않고, OPEC+의 감산을 주도했다. 감산은 지난해에 이어 이달 초까지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미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는 "빈살만의 감산 결정은 미국과 사우디 경제 협력의 상징과도 같은 페트로 달러 체제에서 사우디가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라며 "사우디가 미국 안보의 속국이 아닌 국제 정치에서 독립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강국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가열되는 美·中 통화전쟁...'페트로 달러 가고, 페트로 위안 시대 온다?'
사우디의 독립을 지지한 것은 또 다른 경제 대국 중국이었다. 중국은 사우디와 미국의 관계가 악화된 틈을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사우디 리야드에서 열린 사상 첫 중국-걸프 아랍국가협력위원회 정상회의 기조연설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향후 3∼5년간 중점적으로 추진할 협력 사안을 소개하면서 석유 거래에서 위안화 결제를 중동 산유국 정상들에게 요청했다. 중국이 페트로 위안화를 처음으로 공식화한 자리였다.
이 행사에 앞서 중국 외교부는 공식 홈페이지에 ‘미국의 패권과 그 위험(US Hegemony and Its Perils)’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미국과 패권전쟁의 핵심 전장인 정치·군사·경제·기술·문화 분야 중 하나인 경제 대결에서 미국의 달러 헤게모니에 맞서는 위안화 역할을 제고하는 등 대결의 길을 갈 것’이라는 게 이 글의 골자였다.
중국은 사우디가 수출하는 원유의 25%를 사들이는 최대 석유 수출국이다. 교역 파트너로 양국의 유대관계는 더욱 강해지고 있다. 사우디와 중국간 교역량은 1990년 5억 달러(약 6688억원)에서 2021년 870억 달러(약 116조원)로 급증했다.
교역 증가에 발맞춰 중국의 무역 결제에서 위안화 결제 비중은 3월 기준 48.4%로 증가해 처음으로 달러화(46.8%)를 추월했다. 2010년 위안화 결제 비중이 사실상 전무했던 것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이 비율은 앞으로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시작된 서방의 대러 제재로 양국간 교역량은 확대되고 있다. 현재 세계 상품 교역 시장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15%에 달한다.
중국의 우방국인 브라질이나 러시아도 탈 달러 흐름에 힘을 보태고 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지난 13일 상하이 신개발은행 본부를 찾아 "첫 임기에 나는 매일 밤 ‘왜 모든 나라가 달러로 거래하는지 자문했다"며 달러 패권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브라질과 중국은 14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위안화와 브라질 헤알화를 이용한 거래를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지난달 시 주석과의 회담에서 "러시아를 비롯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국가 간 거래에서 위안화 사용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최근 중국을 방문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미국 달러가 국제경제에서 치외법권을 누리고 있다. 달러에 대한 유럽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고 역설하며 탈달러 움직임에 연대를 표했다.
미 실리콘밸리 VC가 달려간 곳은...기로에 선 美
사우디는 올 1월 달러가 아닌 어떤 다른 통화로든 무역 결제를 할 의향이 있다며 달러 패권에 대한 선전 포고를 했다.
지난 1월 모하메드 알자단 사우디 재무장관은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달러, 유로화, 사우디 리얄 등 어떤 통화로 거래할 지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며 "우리는 중국과 매우 전략적인 관계를 누리고 있고, 미국을 포함한 다른 국가들과도 동일한 전략적 관계에 있다"며 중국을 관계 우위에 두는 듯한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달러 패권에 대한 사우디의 도전에 미국이 어떻게 대응할 지는 미지수다. 우선 내년 차기 대선을 앞두고 유가 등 물가 안정에 올인해야 하는 바이든 대통령으로선 사우디에 가혹한 조치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은 자신의 대선 공약을 접고 지난해 여름 사우디를 찾아 원유 증산을 요청했다가 철퇴를 맞는 굴욕을 겪은 데 이어, 지난달에는 중국의 중재로 사우디와 이란 간 외교가 복원되면서 외교적 타격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미국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VC)들이 일제히 사우디 등 중동 자본에 줄을 대고 있다는 점도 사우디를 자극할 수 없는 이유로 꼽힌다. 고강도 긴축에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으로 촉발된 은행권 위기 확산 이후 돈줄이 마른 미국 VC들은 잇따라 중동 자본 유치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사우디 국부펀드(PIF)의 벤처 자회사이자 사우디 정부계열 투자기금인 사나빌은 최근 실리콘밸리의 유명 VC인 안데르센 호로비츠를 포함한 40개에 달하는 미국 VC들에 투자했다. 미국 유명 VC인 타이거 글로벌 매니지먼트도 60억 달러 규모로 사우디 투자 유치에 나선 바 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도 트위터 인수에 있어 알왈리드 빈 탈랄 사우디 왕자의 자금을 활용하기도 했다.
한편 달러 패권에 대한 위협이 과장됐다는 시각도 있다. 영국의 한 언론은 "위안화를 기반으로 한 교역량이 증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각국 중앙은행 지급 준비금에서 위안화 비율은 3%에 불과하다"며 "세계 경제 활동은 여전히 미국과 그 동맹국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세계 경제에 충분한 통화 유동성을 공급해 줄 수 있는 나라는 여전히 미국이 유일하다"고 지적했다.
달러의 위력은 막대한 유동성, 무역·투자 부문에서 미국의 개방성, 기관에 대한 신뢰에서 기인하는데, 중국의 금융 시스템은 덜 발전돼 있고 자본 통제로 인해 통화 교환이 용이하지 않으며 법치주의도 결여돼 있어 달처 대체제로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조유진 기자 tin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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