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 없어 버스도 못 굴려" 쿠바 경제난에 노동절 행사도 취소
중남미의 공산권 국가 쿠바가 극심한 연료 부족 사태 끝에 1일(현지시간) 전국적인 노동절 행사를 취소했다고 영국 BBC가 보도했다. BBC는 “쿠바에서 경제적 이유로 노동절 행사가 취소된 건 1959년 공산 혁명 이후 처음”이라고 전했다.
외신들에 따르면 쿠바 정부는 이날 수도 아바나에서 예정됐던 노동절 행진을 취소했다. ‘메이 데이’로 불리는 노동절은 공산권 국가인 쿠바에선 국가적인 행사로 꼽힌다. 매년 수십 만 인파가 전국 각지에서 버스를 대절해 수도 아바나의 혁명 광장에 모이곤 한다. 쿠바 노동자 연맹을 비롯한 각종 단체가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옷을 입고 혁명 광장의 ‘체게바라’ 벽화 앞을 행진하곤 한다.
그러나 올해 들어선 석유 부족 사태로 나라가 마비될 지경에 놓이면서 행사가 취소됐다. 대규모 동원에 버스가 필수인데 굴릴 연료조차 부족해서다. 앞서 2020년과 2021년 코로나 확산에 따른 공중 보건 조치로 행사가 취소된 적은 있다.
미구엘 디아스카넬 쿠바 주석은 공산당 기관지에 “우리는 어려운 순간을 지나고 있지만,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앞서 이달 초 “석유 공급 업체들이 계약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쿠바에 필요한 연료의 3분의 2만 공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쿠바에선 하루 최소 500~600t의 정제 석유가 필요한데, 400t이 채 안 되는 물량만 시중에 풀리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아바나를 비롯한 주요 도시의 주유소 앞에는 석유를 구하기 위한 줄이 1마일(약 1.6㎞) 넘게 이어지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주유소 앞에 차를 대놓고 생활하는 ‘차박’이 흔히 벌어지고, “도로에 다니는 차보다 주유소 앞에 줄 선 차들이 더 많다”고 미 CNN 방송은 전했다. 생계가 걸린 택시 운전기사들은 “하루치 주유를 위해 이틀 줄을 선다”고 불평하고 있다. 운전사들끼리 주먹다짐을 벌이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재클린 로드리게스는 CNN에 “마을의 주유소가 문을 닫아 남편과 딸을 데리고 한 시간 거리의 아바나로 운전해 왔다”면서 “주유소 앞에서 3일 동안 기다리며 차에서 잠을 잤다. 줄을 서야 하는데 노동절에 어떻게 가겠나”고 말했다.
이 같은 에너지 대란의 배경엔 쿠바의 주요 석유 수입국인 ‘사회주의 동료’들이 위기를 맞은 탓이 크다. 특히 베네수엘라가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의 부정 선거 여파로 극심한 경제·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는 게 결정타가 됐다고 한다. 섬나라인 쿠바는 전력 생산의 96%를 석유 원료에 의존하는데, 이중 절반은 자체 생산하고 나머지는 선박을 통한 베네수엘라산 석유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앞서 1999년 베네수엘라의 좌파 포퓰리스트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쿠바의 오랜 실권자 피델 카스트로와 손을 잡고, 쿠바에 사실상 무제한의 석유 공급을 하기로 약속했다. 쿠바는 대신 의료계 종사자, 스포츠 트레이너 등 인력을 베네수엘라에 송출하기로 했다.
그런데 최근 몇년 간 미국의 마두로 정권에 대한 경제 제재와 베네수엘라 정부의 실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베네수엘라 경제는 수렁에 빠져 들었고, 쿠바 경제가 덩달아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특히 올해 들어 베네수엘라산 고품질 원유 수입이 50% 급감하게 됐다고 한다. 쿠바인들은 이 때문에 자동차 대신 도보나 자전거, 심지어 마차를 이용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묘사했다.
쿠바의 또다른 석유 수입국인 러시아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실정이다. CNN은 “보통 외교관들은 지정된 주유소를 쓸 수 있지만, 이곳도 최근에 줄을 서야 연료를 구입할 수 있다”면서 “러시아가 자국 외교관들만 앞줄에 세워주고 있다”는 현지 외교관의 증언을 전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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