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소년의 행복 무너뜨린 학교, 비극의 출발점
[김상목 기자]
▲ 영화 <클로즈> 포스터 이미지 |
ⓒ 찬란 |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른바 '정식화'를 똑 부러지게 잘하는 이들이 항상 부러웠다. 늘 단호하게 큰소리로 포효하거나 단칼에 무 자르듯 뭐든 확실히 규정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척 신기하고 대단해보였다. 대조적으로 본인 자신은 뭐든 선택을 잘 하지 못했다. 거의 결정 장애 수준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제대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 채 골머리를 썩이는 게 다반사였다. 그러다 보니 나는 왜 이럴까 종종 한탄하곤 했다. 그러니 정식화 잘하는 이들이 그저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하지만 그와 함께 의구심도 생겨나곤 했다. 세상만사 복잡한 일투성이인데 그들은 어쩜 저렇게 선명하고 분명할 수 있을까 하는 삐딱 선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저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하는 식이다. 종종 그런 의혹은 다만 질투와 노파심에 불과한 걸로 입증되곤 했지만 가끔은 슬픈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세상에는 숱한 개별의 진실이 있고 그들은 서로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단 말을 내뱉거나 행동을 결정할 때는 두 번씩은 생각해보자 다짐하곤 했다. 물론 그 다짐은 자주 연기처럼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숱하게 말아먹고 일을 그르치곤 했었다. 그래도 다짐이 종종 작동해준 덕분에 실보다는 득이 많았던 건 분명하다.
<클로즈>를 연출한 1991년생 루카스 돈트 감독도 내지르기보단 한없이 곱씹고 또 곱씹는 성장기를 보내지 않았을까? 영화를 보고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2018년도 전작 <걸>에서 감독은 16살 트랜스젠더 발레리나 주인공의 이야기를 선보여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장편 데뷔작으로 그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남우주연상과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으니 초심이 흔들릴 법도, 자신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전작을 답습하는 매너리즘의 유혹을 받을 만도 할 텐데 감독은 자신이 잘 하는 걸 더욱 더 연마하는 정공법을 택했다. 세상의 성별 정체성, 아니 뭐든 구분하고 규정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자들에 직면한, 그저 춤을 추고픈 한 인간의 초상은 후속 작품에서도 여전히, 아니 더욱 깊고 진하게 우려내는 듯했다. 그의 신작 또한 그런 시련에 직면한 순수한 이들의 내면이 겪게 되는 사건과 극복의 과정이다.
▲ 영화 <클로즈> 스틸 이미지 |
ⓒ 찬란 |
영화가 시작된다. 잃어버린 에덴동산처럼 꽃이 만발하고 푸른 자연이 펼쳐진다. 그 가운데에는 아직 변성기도 오지 않았을 아름다운 두 소년이 존재한다. 마치 그리스 신화 속에 묘사되는 숲과 들판의 요정 님프 같은 분위기가 가득하다. 두 소년은 아름다운 자연과 자상한 부모의 배려 속에 결핍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환경에서 마음껏 뛰어논다. 소년들은 낙원에서 자유롭게 어울리는 중이다. 하지만 그런 둘에게는 국가에서 규정한 학교생활이 다가온다. 처음 학교에 도착할 때만 해도 카메라는 오직 둘에게만 집중적으로 클로즈업된다. 하지만 학교에 도착한 직후부터 화면의 축척은 점점 서서히 전체 풍경으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확장된 외부세계는 이제껏 둘만으로 충만했던 소년들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둘만의 세계를 더 이상 고수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학교 환경은 억압이나 차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교실은 대화와 토론을 중시하는 민주적인 공간처럼 묘사된다. 처음 만난 아이들은 교사의 제안으로 각자 자기소개를 시작한다. 서로 인종도 성별도 제각각 다르지만 크게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풍경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프로운동선수나 정치가가 되려는 아이도, 아직 장래희망을 정하기보다는 노는 게 마냥 좋은 아이도 있다. 그 한가운데에 두 소년, '레오'와 '레미'가 위치하고 있다.
동급생들의 시선은 꼭 붙어있는 레오와 레미에게 자연스럽게 집중된다. 하지만 조심스레 둘의 관계를 파악하려는 여자아이들이건,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죽어도 아직 가책을 못 느낄 시기라 둘에게 '호모'라며 잔인한 말을 내뱉는 남자아이들이건 낯선 타인들의 관심과 접근은 뭐든 둘에겐 불편할 뿐이다. 소년 중 레오는 이런 상황이 퍽 부담스럽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 그래서 떨어질 수 없을 것 같던 친구 레미와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하지만 레미는 그런 레오의 태도변화가 당황스럽다. 레미의 혼란은 깊어만 간다.
레오는 그가 속하게 된 세상의 질서에 잘 적응해보려 노력하는 중이다. 하지만 레미는 그런 친구가 통 이해되지 않는다. 자신들 둘만으로도 세상은 충만하지 않은가. 자신과 레미는 그저 영혼의 형제 같은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의심하는 아이들이 헐뜯 듯 둘의 관계는 동성애와는 거리가 멀다. 아니, 아직 그런 세속적 규정화와는 동떨어진 채 그들만의 세상을 공유하는 순수한 관계다. 레미는 그런 둘만의 세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레오가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태도는, 마치 자신의 일부를 생살 베어내는 고통과도 같다.
이윽고 어떤 사건이 그들 사이에 일어난다. 이제 더 이상 레오와 레미는 함께할 수 없다. 그 충격은 생각보다 깊고 뼈저리게 아프다. 레오는 레미의 부재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뒤늦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갈수록 심화되는 혼돈 속에서 이제 레오는 레미 대신에 의지할 대상을 찾아야만 한다. 하지만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죄의식에서 빠져나오지 못 하는 소년의 방황은 깊어만 간다.
▲ 영화 <클로즈> 스틸 이미지 |
ⓒ 찬란 |
루카스 돈트 감독이 풀어내는 이 잔인하고 아름다운 성장담은 뭐든 구분하고 규정하지 않으면 세상의 질서가 무너질 것처럼 불안에 빠지는 우리에게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그 감정은 죄의식과도 통한다. 레오와 레미의 관계는 특별하고 순수하다. 그들의 농밀한 감정은 세간의 이분법으로 딱 나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그저 의식을 공유하는 다른 몸인 양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애틋한 중력장이 각자 너무나 강력할 뿐이다.
만약 둘이 처음 화면에서 목격했던 바대로 성장할 수 있었다면 그들의 미래를 누구도 함부로 예단할 수 없었을 테다. 하지만 획일화를 즐기고 소수의 의외를 부정하는 이 세상은 그들의 특별한 관계를 그냥 놔두지 않는다. 레오와 레미가 함께 벨기에의 아름다운 정원을 자전거로 내달릴 때 청춘영화에서만 가능할 싱그러움을 접하게 되지만 이윽고 그들이 탄 자전거가 과연 끝까지 안전할 수 있을까 괜시리 걱정하게 된다. 그리고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이다.
세상에 찌들어버린 우리는 어떻게든 두 소년의 관계를 특정한 기준선으로 규정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아마 <클로즈>를 보고 난 뒤에도 혹자는 이 영화를 성적 소수자의 가슴 아픈 비극으로 해석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또 다른 입장을 가진 이들은 둘이 겪는 시련을 그저 청춘 성장기로 단정해버리고 싶을 테다. 하지만 레오와 레미의 관계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다. 레미의 중반 이후 부재를 차마 견딜 수 없었던 레오는 필사적으로 그 허전함을 채우고자 시도한다. 새로 사귄 또래 친구와 어울리기도, 친형에게 레미와 닮은 역할을 기대하며 매달리고 한다.
필사적으로 관계를 추구하는 레오와 그 대체재인 상대방의 관계는 언뜻 레미에게서 단지 상대만 교체되었을 뿐 동일한 느낌처럼 보이기도 한다. 역설적으로 레오와 레미 사이의 관계를 주변에서 의심했던 의혹은 정작 레오가 레미와 이별한 후 보이는 다른 이들과의 유사한 관계성 덕분에 비로소 불식되는 셈이다. 그러나 레미가 레오의 마음속에 차지하던 지분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순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대상만 추가된다 해서 레오가 레미의 부재를 해소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물론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레오의 성장통은 그가 겪는 육체적 고통으로 은유되고, 레미의 가족에 대한 소년의 죄의식을 통해 구체화된다. 보는 이마저 안쓰럽게 만드는 레오의 이별 후 시간은 그저 소년이 상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기왕 낙원에서 쫓겨나 황량하고 위험한 세상에 나왔으니 상처를 감수하고 세상에 부딪쳐야만 극복할 수 있는 차원이다. 아름다운 전원 가득 펼쳐진 꽃밭에서 가족의 생업이던 꽃송이 수확작업을 돕던 소년은 마치 스스로 그 꽃들의 부분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그 일부는 정작 다른 꽃을 무수히 꺾는 존재이기도 하다. 레오는 본심은 아니더라도 레미 외에 다른 이에게도 상처를 남긴다. 자신이 잔인한 세상에 정착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배덕의 감정은 타인과 자기 사이에 고슴도치의 곧추 세운 바늘처럼 상처를 주고받게 만들고 있다.
▲ 영화 <클로즈> 스틸 이미지 |
ⓒ 찬란 |
그렇게 둘만의 잃어버린 낙원에 혼자 남은 레오는 자신만의 싸움을 이어간다. 세상은 그저 호기심에서 출발한 짓궂음으로 하나의 영혼을 가진 두 소년을 강제로 떼어놓는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방어적인 태도로 레미를 밀어내고 그로 인해 상실을 초래한 레오는 중반 이후 내내 친구의 부재를 어깨에 짊어지고 가혹한 운명에 처한다. 레오는 다각도로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도전에 나선다.
처음 취한 해결책은 레미의 대체재를 찾는 것이다. 사이가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레미와는 비교할 수 없었던 친형과 한동안 레미와 함께 보냈던 것처럼 지내보지만 형의 태도는 절친을 잃은 동생에 대한 염려에서 기인한 것에 불과하다. 다음으로는 또래 사이에서 중심이 되는 새 친구와 어울리는 것이다. 둘은 괜찮은 친분을 쌓지만 그저 동급생 친구일 뿐이다. 아직 청춘 로맨스에 뛰어들기엔 어리기도 하고.
다음으론 자신과 타인에게 화를 내거나 문을 닫아거는 위악 또는 자기학대 행보다. 레오는 괜히 레미를 추모하는 대화 자리에서 자신과 레미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며 동기에게 시비를 건다. 레미가 자신에게 호소하며 매달리던 것처럼 둘만의 사이를 과시하는 태도다. 레오는 그렇게 레미가 간절히 갈구할 때는 애써 외면하던 태도를 뒤늦게 전부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떠난 레미는 답이 없다.
그 모든 시행착오 끝에 레오는 폭발하고 포효한다. 마치 상처 입은 들짐승이 포효하듯, <시튼 동물기>의 상징적 에피소드인 늑대왕 로보가 인간들의 간계로 반려를 잃고 울부짖듯 말이다. 감정을 터뜨리고 고백을 빌어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폭로한다. 그 격한 카타르시스의 순간을 경유해 레오는 가장 위태로운 고비를 뛰어넘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레오의 내면을 꿰뚫어보았다 말할 수 있을까?
<작품정보> |
클로즈 Close 2022|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드라마 2023.05.03. 개봉|104분|12세 관람가 감독 루카스 돈트 주연 에덴 담브린(레오 역), 구스타브 드 와엘(레미 역) 출연 에밀리 드켄(소피 역), 레아 드뤼케르(나탈리 역), 이고르 반 데셀(찰리 역), 케빈 얀센스(피터 역), 마르크 바이스(이브 역) 수입 및 배급 찬란 공동배급 (주) 하이스트레인저 공동제공 ㈜ 51k 2022 75회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2022 69회 시드니영화제 시드니영화상 2022 58회 시카고국제영화제 실버휴고 심사위원특별상-국제경쟁, 골드Q휴고상-아웃-룩경쟁 2022 94회 미국비평가협회상 국제영화상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년간의 추락... 윤석열 정부의 국가시스템 붕괴와 국정혼돈
- [영상] 광주 투입 특전사 K "시민들 훌륭했다, 전두환 독재에 희생"
- '노동절'에 몸에 불지른 노동자..."윤석열 정권 심판"
- 알바로 번 돈 500여 만원 두고 남편이 펄펄 뛴 이유
- [박순찬의 장도리 카툰] 윤윅
- 대통령실은 왜 전광훈을 고발 않나
- 대전 도심 한복판에 농장... 30대 농부의 이유 있는 고집
- "창원대도 천원 아침밥 시작, 싸고 맛있어 정말 좋아요"
- 정부, '북한 경제·사회 실태보고서' 11월 첫 공개 발간
- 단재고 교육과정 대입 불리해 개교 연기? "반대 위한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