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야근합니다"…밤9시 빛나는 주식회사 한국의 등대
서울의 야경은 아름답다. 빽빽한 빌딩 숲을 채우고 있는 높은 건물들이 밤에도 반짝이는 불빛을 쏟아낸다. 세계를 덮친 불황과 무역적자로 한국 경제가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 한국 주요 기업은 어둠 속에서 앞으로 나간다. 주요 기업 본사나 사옥은 등대다. 일하는 사람들 때문에 밤에도 환하게 빛난다. 빛나는 등대들 덕분에 과거 수많은 경제 위기를 넘었다. 아름답지만 애환도 있다. 집에선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다. '일주일 동안 일할 수 있는 시간'을 두고 노사(勞使)·노노(勞勞)·세대·업종 간 의견이 팽팽하게 갈린다. 평일 밤 9시 무렵 불 켜진 주요 기업 사옥을 들여다봤다.
4월 27일 밤 9시.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는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다웠다. 밤에도 불이 환하게 켜진 LG트윈타워는 LG그룹 본사다. 구광모 회장도 이곳 동관 30층에서 일한다. LG전자를 비롯해 LG화학, LG디스플레이 등 LG 계열사들이 모두 이곳에 있다. 사실 LG는 4대 그룹 가운데 가장 '워라밸이 좋은 곳'으로 소문나 있다. 좋게 말하면 업무를 효율적으로 한다는 뜻이다. LG전자는 올해 1분기 삼성전자보다 많은 1조5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그래도 일부는 야근한다. 밤 9시 건물 안에는 아직 집에 가지 못한 누군가의 아빠가 책상 앞에서 컴퓨터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LG트윈타워는 밤 7시, 8시, 10시 등 일정한 시간이 되면 사무실 불이 자동으로 꺼지는 자동 소등 장치가 작동한다. 하지만 당직 등 사유로 야간 근무가 필요한 직원들과 청소 근로자들 때문에 사실상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건물이 됐다. 퇴근 시각을 알리는 일명 '퇴근송'은 오후 5시30분에 나온다. 일주일 40시간만큼만 입력이 되는 출퇴근 근태 기록 시스템이 있기는 하지만 40시간을 넘게 일한다고 컴퓨터가 켜지지 않거나 꺼지지는 않는다.
강남역 인근 어디서든 보이는 삼성전자 서초사옥 역시 밤 9시가 넘어도 각 층 사무실 불은 켜진 상태다. 삼성전자 서초사옥에는 이재용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의 집무실, 회의실이 있다.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증권 등 삼성 계열 금융사 본사 직원들도 이곳에서 근무한다.
24시간 돌아가는 금융시장을 주 무대로 근무하는 금융사 직원이 많은 건물 특성상 야근자도 많다. 수원, 평택, 화성 등 서울 근교에 있는 삼성전자 사업장 및 공장 내 직원은 일정 시간에만 다니는 출퇴근 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강제 퇴근이라도 한다. 하지만 서울 근무자는 사정이 다르다. 서울에서 근무하는 한 삼성전자 직원은 저녁 6시 식사 자리에 가방을 가져오지 않았다. 반주를 곁들인 식사 후에 돌아간 곳은 집이 아닌 사무실이었다.
종로구 서린동에 위치한 SK그룹 본사 사옥에는 지주사인 SK㈜와 SK이노베이션, SK E&S 등 그룹 주요 계열사들이 입주해 있다. SK 계열사들도 근무체제의 기본 구조는 근로자 본인이 8시간 근무를 원칙으로 일하는 시간을 정하는 탄력근무제다. 출퇴근 시간을 회사 차원에서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오후에 출근해서 저녁까지 일하는 것도 가능한 구조다. 탄력근무제로 인해 일하는 시간이 각각 다르다 보니 컴퓨터 자동 꺼짐이나 강제 소등 같은 시스템도 적용하지 못한다.
현대차·기아 양재동 본사에는 재경·인사·구매 등 주요 지원부서가 몰려 있다. 이 회사는 노동조합 목소리가 센 편이라 야근이 제한적일 법한데, 본사 건물에서 일하는 직원 대다수는 조합 소속이 아니다. 물론 다른 회사와 마찬가지로 직원 개개인별로 근무기록은 남긴다. 정해진 시간을 넘기면 PC가 꺼지고 사무실 불은 꺼진다. 퇴근 시간을 넘겨 일해야 할 때는 그때마다 사내 시스템에 입력하고 관리자에게 알리면 된다. 한 번 입력하면 4시간 단위로 갱신이 가능하다.
양재동 보다 더 야근이 잦은 곳은 화성에 있는 기술연구소(남양연구소)다. 외진 곳에 있는 탓에 통근버스로 다니는 이가 많고 오후 8시를 넘기면 버스가 끊기지만, 주요 프로젝트가 많고 이에 따라 야근을 피하기 힘든 부서들이 몰려 있다. 다만 이곳에서도 조합 소속인 젊은 연구원들은 늦은 밤까지 야근하는 일이 적다. 늦은 밤까지 남는 직원 대부분은 관리자급 고참 연구원이다.
포스코에서 팀장을 맡고 있는 강진구씨(가명·46세)는 해 뜨기 전 출근하고 해가 진 후 퇴근한다. 매일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그렇다. 딱히 업무가 많아서라기보다 모시고 있는 임원 출근 시간이 해 뜨기 전, 퇴근 시간이 해가 진 후이기 때문이다. MZ세대 직원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는 임원보다 먼저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야 한다는 조직문화가 익숙한 '끼인' 세대다.
가끔은 월요일 회의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일요일도 출근한다. 물론 포스코는 표면적으로 평일 8시 출근 5시 퇴근이다. 탄력근무제까지 적용하고 있어 업무 시간은 개인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초과 근무를 한다고 해서 컴퓨터가 꺼지거나 하지 않는다. 의무 연차를 쓰고도 출근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장교동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옆에는 한화그룹 사옥이 있다. 한화는 혼잡도를 줄이기 위해 계열사마다 출퇴근 시간이 다 다르다. 또 탄력근무제도를 시행 중이어서 정해진 출퇴근 시간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진다. 하지만 여전히 밤에도 일하는 사람이 많다. 한화 본사는 장교동에서 밤에 가장 빛나는 건물 중 한 곳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통계청 및 고용노동부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상용근로자의 월평균 초과근로시간은 2022년 8.2시간으로 집계됐다. 전경련이 MZ세대 827명을 대상으로 ‘기업 인식 조사’를 한 결과에서는 '월급보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보장되는 곳'(36.6%)이 취업하고 싶은 기업 1위를 차지했다.
박선미 기자 psm82@asiae.co.kr
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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