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안되는 신학서적 출판 외길… “‘한국 신학 정리’ 평가에 보람”
발자국 안에 천사가 있다. 기독교에서 회심을 상징하는 보랏빛 바탕에 발자국은 내면을 상징하는 의미로 아래쪽을 향한다. 발자국 안에는 하얗고 푸르른 천사들의 깃털로 가득하다.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면서 은혜 아닌 게 없음을 떠올린다. 천사의 날개가 투영된 발자국을 통해 주님께서 동행해주신 삶이었다고 고백한다. 한들출판사에서 디자인을 담당하는 화가 임규열(66) 사모의 ‘발자욱 속의 천사’ 그림이다.
지난달 1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이즈갤러리에서 한들출판사 공동대표인 정덕주(68) 목사와 화가 임 사모를 만났다. 이날은 임 사모의 생애 두 번째 개인전 전시의 마지막 날이었다. 신학서적 출판 외길을 고집하며 31년째 출판 목회를 일궈온 정 목사와 표지 삽화 등 디자인 담당으로 함께 책을 만들어온 임 사모가 작품들 앞에서 인생을 이야기했다. 정 목사는 “부족하나마 한국 신학을 정리해온 31년”이라고 말했다.
부부는 서울장신대 출신으로 1980년대 경기도 평택에 교회를 개척한다. 시골교회의 어려움과 막막함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부부는 5년 만에 목회를 내려놓고 원점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기도하며 응답을 기다린다. 그런 후에 내린 결론이 출판 목회였다.
“책을 만드는 일은 한 사람에게 축적된 정신을 오롯이 묶어내는 일입니다. 그 한 줄기 샘물이 모여 초목을 자라게 하듯, 정신을 묶어낸 책이 우리가 사는 시대를 성장시킨다고 믿습니다. 출판은 우물 파기와 같습니다. 저자와 독자를 통해 시대정신의 흐름에 수로를 터주는 일입니다. 1992년부터 기독교 신학서적과 교회에 필요한 책을 출판하며 저자와 독자를 비롯한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정 목사가 한들출판사 소개 글을 통해 밝힌 ‘출판 목회를 하는 마음’이다. 1980년대 후반 한영제 장로의 기독교문사에서 일하게 된 정 목사는 1992년 박동현 장로회신학대 교수의 전남 나주 목회 현장을 다룬 ‘우산교회 이야기’를 시작으로 한들출판사 이름의 책을 내기 시작했다. 화가를 지망하던 임 사모는 표지 디자인과 글자체 선택 등 책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재능을 보탠다. 지금까지 부부는 1100종 넘는 책을 함께 만들어왔다. 임 사모는 “개척 목회를 내려놓았을 당시의 어려움에 견주면 출판 목회는 물 만난 물고기 같은 축복의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물론 신학서적 발간은 쉽지 않다. 단행본보다 경제성이 낮다는 이유로 대형 기독 출판사조차 신학서적을 줄여가는 추세다. 한들출판사는 그런데도 10권 이상의 시리즈로 이어지는 신학전집 발간을 멈추지 않는다. 연세대와 감리교신학대 교수를 역임한 소금 유동식(1922~2022) 전집과 장로회신학대의 오늘을 만든 청포 박창환(1924~2020) 학장의 전집을 발간했다. 서울신학대 학장을 역임한 조종남 교수의 전집 등을 준비했으며 한신대의 기틀을 다진 신학자의 또 다른 전집도 준비 중이다. 말 그대로 ‘장감성’(장로교 감리교 성결교)의 한국 신학 기틀을 다진 인물들이다. 정 목사는 “한국 신학을 정리하는 곳이란 평가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실 목사고시를 보는 수험생들에겐 한들출판사 이름이 더 익숙하다. 1997년부터 25년간 한들출판사는 목사고시 수험장 앞에서 목회자가 되려는 수험생들에게 새로 나온 신학서적을 한 권씩 무료로 선사해 왔다. 지난해에는 이형기 장신대 역사신학 명예교수가 저술한 ‘칼 바르트와 위르겐 몰트만 신학에 있어서 성경의 중심사와 종말론’ 이름의 책을 나눴다. 정 목사는 “좋은 목회자가 되시라는 응원의 의미로 책을 나누어 온 것”이라고 밝혔다.
화랑에 걸린 임 사모의 그림 가운데 ‘하늘 나그네-素琴 선생’ 제목의 작품이 눈에 띄었다. 장발을 휘날리며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노인으로 한국의 풍류신학을 정립한 소금 유 교수의 뒷모습을 담았다. 성서학 선교학 종교학 교회사 등은 물론 예술신학에도 능했던 소금 선생이 남긴 글 전체는 한들출판사 책에서 만날 수 있다.
노란 바탕에 다홍빛 꽃 그림들 사이로 이번엔 발자국이 위를 향해 그려진 작품의 제목은 ‘내 안의 그림자와 화해하다’이다.
출판 목회를 함께하며 달려오는 동안 일에 치여 그림에 대한 열정을 쏟아붓지 못했던 임 사모는 “억압받던 내면의 상처들과 화해하고 더욱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밝혔다. 화가로서 그는 2019년부터 영락미술정기전과 한국크리스천아트페스트 등 단체전에 참여하는 한편 개인전을 지속하고 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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