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잰걸음의 봄날

2023. 5. 2.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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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 시인

봄은 잰걸음으로 왔다가 잰걸음으로 갈 모양이다. 한꺼번에 화들짝 피어나는 봄꽃들. 개나리, 산수유, 진달래, 벚꽃들이 다투듯 일제히 만개했다. 높은 산의 야생 벚꽃은 좀 늦게 피는 법인데, 오늘 걷다가 보니 마을 둘레의 산속에도 연분홍 꽃구름이 듬성듬성 내려앉은 듯 벚꽃들이 꽃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 걷다 보면 어깨춤이 절로 들썩인다.

산천은 가히 꽃대궐. 오늘 같은 날은 서둘러 걸을 일이 없다. 뾰족뾰족 봄풀들이 돋는 연둣빛 둑길을 걷다가 앉아 쉬다가 다시 일어나 천천히 걸으며 꽃대궐 풍광을 만끽하고 있는데, 문득 카톡이 울린다. 손전화를 꺼내 열어 보니, 산골짜기 고등학교에서 국어 선생을 하는 후배 시인. 지금 뭐 하냐고 묻는다. “하하, 미안하네. 혼자 걸으며 산벚나무 꽃잔치를 즐기고 있네!” 자주 만나는 사이인 후배 도반이 응원을 잊지 않는다. “아니에요, 형님은 지금 은퇴의 백미를 누리시는데?”

「 어깨춤 들썩이는 꽃대궐 잔치
나뭇가지 주어다 새집 만들어
남은 삶 놀이하듯 살고 싶을 뿐

삶의 향기

후배의 전화를 받고 나서 다시 천천히 걷는데, ‘은퇴의 백미’란 후배의 말이 긴 여운으로 남는다. 아마도 후배가 말한 은퇴의 백미란 언뜻 한가로워 보이는 내 삶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 그런데 실상 나는 그렇게 한가롭지 못하다. 여기저기 써야 할 글들이 밀려 마음을 보채는 일이 잦고, 일부러 찾아가 챙겨야 할 아픈 벗들도 많다. 한가로워 일이 없는 존재를 신선이라 한다지만, 나는 아직 일없기를 바라지도 않고 신선의 경지는 언감생심이다. 인생살이가 괴롭고 아픈 이들과 어깨동무하고 살아가는 것이 늘그막의 작은 바람이라면 바람이다.

오후엔 책을 읽다가 좀이 쑤셔 새집을 한 채 지었다. 사실 나는 지난가을 새들의 쉼터인 나무를 베어버린 것을 미안해하고 있던 터. 십년쯤 자란 꾸지뽕나무였는데. 가시가 날카로워 전정해 놓은 가지에 발을 여러 번 찔려 고생을 했고, 또 붉은 열매가 익을 무렵 물까치 떼가 몰려와 다 따먹어버려 홧김에 베어버렸던 것.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열매를 녀석들이 서리해 가는 것을 본 순간, 후여후여~소리쳐 쫓아버리자 곧 이웃집 큰 밤나무 위로 올라가 시위하듯 깍, 까악 우짖어대는 것이었다. 그날따라 우짖는 소리가 오래전 내 아버지 살아계실 때 이웃집 자린고비 노인을 두고 구시렁거리시던 욕설처럼 들렸다. 에구, 저 좁쌀영감!

그동안 새집 몇 채를 지어 집안의 여러 나무에 매달곤 했지만, 이번엔 새들이 좋아할 만한 자연 소재로만 지었다. 산책하던 길가에 버려진 나뭇가지들을 주워다 직사각형의 새집 골격을 짜고 바닥과 지붕도 나뭇가지를 잘게 잘라 깔고 덮었다. 출입구도 따로 만들지 않고 사방을 트이게 하여 어느 방향에서나 새들이 들어 쉬고 놀며 먹이를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새집을 완성한 후 새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장독대 뒤 소나무 가지에 매달았다. 혼자 마을 둘레길 산책을 나갔던 옆지기가 대문을 열고 들어와 소나무에 매달린 새집을 보더니 엄지 척!을 하며 “푸른 소나무와 잘 어울리네요!” 한다. 그러면서 며칠 전 책에서 읽었다며 이야기 한 자락을 풀어놓았다.

지리산 속에는 연못이 있는데, 그 주위에는 소나무가 죽 늘어서 있어 그 그림자가 언제나 못에 쌓여 있었다고 한다. 그 연못에는 물고기들이 있는데 무늬가 몹시 아롱져서 마치 스님의 가사와 같아, 이름하여 가사어(袈裟魚)라고 했다고. 소나무 그림자가 변한 무늬를 지닌 그 물고기들은 잡기가 매우 어렵다고. 그 물고기를 잡아서 먹으면 능히 병 없이 오래 살 수 있다고 한다.

옛날얘기를 구수하게 잘 푸는 능력을 지닌 옆지기 말이 끝난 후 내가 물었다. 왜 하필 새집 올린 걸 보며 그 얘기를 들려주냐고? 새집을 매단 곳이 마침 소나무라 그 얘기가 떠올랐다며 덧붙였다. “당신이 새들한테 먹이 주러 소나무 밑을 자주 드나들 텐데, 당신 몸에도 가사어처럼 소나무 그림자 무늬가 새겨지면 당신도 장수할 것 같아서요….”

옆지기에게 고맙다고 말은 했지만, 나는 딱히 오래 살고 싶지는 않다. 요즘 사람들은 너나없이 너무 오래 살고 싶어 한다. 나는 더 편하게, 지금보다 더 풍족하게 사는 길을 찾느라 짧은 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다만 순간순간 놀이하듯 살다 가고 싶을 뿐. 잰걸음으로 왔다가 잰걸음으로 가는 꽃들의 개화와 낙화를 보면서도 오래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은 지구 어머니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진하 시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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