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100만인데 한국 1000만 당원…거품 낀 당, 팬덤에 잡혔다

정효식 2023. 5. 2.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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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여야 정당들에 가입한 당원 숫자가 10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이 당원인 나라가 됐다는 뜻이다. 2021년 중앙선거관리위에 각 정당이 보고한 ‘2021년도 정당의 활동개황 및 회계보고’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485만여 명, 국민의힘 407만여 명, 정의당 5만여 명 등 전체 당원 수는 1042만9000여 명에 달했다. 2004년 195만5000명에서 16년 새 5배로 폭증한 것이다. 1000만 당원 시대에 걸맞게 정당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렸는가에 대해선 정반대라는 분석이 나왔다.

국회미래연구원은 1일 1000만 당원 시대 ‘참여의 그늘’을 해부한 「만들어진 당원: 우리는 어떻게 1천만 당원을 가진 나라가 되었나」란 제목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대중 정당의 역사가 100년이 훨씬 넘는 영국·독일 등은 당원이 100만 명이 안 되고 감소 추세인데 한국의 1000만 당원은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현상이다. 190년 역사의 영국 보수당이 17만 명, 150년 된 독일 사민당은 41만 명인데 한국 정당이 10~20배 많기 때문이다. 사실상 유일 정당인 북한 노동당 당원 수(650만 명 추정)보다 많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보고서는 1000만 당원의 비밀을 ▶80%에 달하는 자신이 당원인지조차 모르는 ‘유령 당원’과 ▶각종 공직 후보자들에 의해 ‘매집된 당원’ ▶대통령 후보자 등 특정 팬덤 리더를 위해 당을 ‘지배하려는 당원’ 등 3가지 유형으로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유령 당원(당원 아닌 당원)은 여야 정당들이 대선 경선을 치렀던 2021년 한 해에만 당원 수가 166만 명 늘어나는 등 당원 폭증 현상의 대부분을 설명한다. 당원 가입이 풀뿌리 정당 조직에 의해 꾸준히 늘어난 게 아니라 총선·지방선거·대선과 같은 선거 때마다 실제 가입 의사 등을 확인하지 않고 입당 원서만 모집해 대부분 허수(虛數)로 불어났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2019년 조사 자료를 인용해 자신이 당원임을 알고 있는 당원은 5.8%에 불과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중앙선관위 자료를 보더라도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2021년 소속 당원이 400만 명을 넘는다고 신고했지만 이 가운데 월 당비 1000원 이상을 납부한 당원은 각각 60만여 명, 129만여 명에 불과했다.


36만여명 석달치 당비가 고작 10억…“당원 가입운동으로 당 장악”

여기서 같은 해 대선 경선 투표권을 가진 책임(권리) 당원은 56만9000명과 71만9000명으로 더 쪼그라들었다.

보고서는 이어 국회의원은 2000~5000명, 지방의원은 500~1500명 등 공직선거 후보자들이 선거 때 혈연·학연·지연을 총동원해 ‘매집한 당원’들도 상당수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매집된 당원’은 최소한 당원 가입을 알고는 있다는 점에서 유령 당원과 다르지만 특정 후보자와 친분·인연에 따라 반짝 입당해 해당 경선 등에 표를 주는 것 외에 정당 활동에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이에 따라 세 번째 유형인 당을 지배하려는 당원, ‘팬덤 당원’이 현재 여야 정당들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봤다. 이들은 팬덤 리더의 대선후보 또는 당 대표 선출 같은 정치적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단기간 집중적인 온라인 입당을 통해 당을 장악했다. 전통적 당원·대의원·당직자를 특권집단 또는 부패집단으로 모는 등 팬덤 리더 외엔 당 안팎의 경쟁자를 악마화하는 분열과 증오 정치의 동력이 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경선 경쟁자였던 이낙연 전 국무총리의 출당 운동을 주도한 ‘개혁의 딸’ 등 친명 강성 지지층이 대표적이다. 전 국민 당원 가입 운동을 벌여 국민의힘을 장악하겠다고 선포한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 역시 비슷하다. 태영호 최고위원이 “(지난 전당대회 때) 엄한 곳에 도움을 구걸하지 않았다”고 지목한 대상도 전 목사였다.

팬덤의 당 장악은 비용도 적게 든다. 2021년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 당시 투표한 책임당원 36만여명 3개월치 당비를 기준으로 고작 10억원 정도다.

보고서를 공동 작성한 박상훈 거버넌스그룹 연구위원은 “여야가 참여를 명분으로 온라인 투표 등 개방형 경선을 도입한 뒤 10만~20만 명 상당의 팬덤 당원만 있으면 당권은 물론 대선후보가 될 수 있게 됐다”며 “포퓰리스트만 승자가 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윤왕희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기성 정당이 중앙당만 있고 당원 기반은 취약해 외부 팬덤 세력의 포획(hijacking)이 쉬웠다”며 “지역 풀뿌리 정당이 생겨나도록 정당법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효식 기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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