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정원으로의 초대장, 운 자르뎅 아 시테르
향기로운 일상 탈출을 실현시켜 주는 에르메스 자르뎅 컬렉션에서 새로운 향을 선보인다. 에르메스 조향사 크리스틴 나이젤이 일곱 번째 자르뎅 컬렉션을 위해 떠올린 건 어릴 적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시테르 섬으로 떠난 첫 여행이었다. 일 년 내내 태양이 빛나는 섬, 이름만 들어도 여행 가고 싶은 섬,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태어난 것으로 전해지는 섬, 너그러운 대자연의 섬…. 크리스틴 나이젤에게 시테르 섬은 푸르지도, 꽃이 만개하지도 않았지만 금발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빛 정원의 감상을 불러일으켰고, 그 이미지로 구성한 향이 바로 ‘운 자르뎅 아 시테르’다. 이 향의 출시를 앞두고, 에르메스가 〈엘르〉를 그리스 아테네로 초대했다. 크리스틴 나이젤의 눈앞에 펼쳐졌던 목초와 나무들, 그녀를 감싸 안아주던 바람, 코끝을 간질이는 신선한 피스타치오와 올리브나무의 향기가 느껴지는 미지의 도시로 말이다.
운 자르뎅 아 시테르 오 드 뚜왈렛의 론칭 이벤트는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Agora)’를 테마로 진행됐다. 아크로폴리스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시민 일상생활의 중심이자 시장 기능을 했던 아고라처럼, 피스타치오와 올리브나무 등을 원료로 하는 다양한 그리스 특산품으로 가득한 장터가 열려 있었다. 전 세계 프레스와 인플루언서들은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는 ‘에르메스 장터’에서 신선한 올리브오일과 올리브나무를 깎아 만든 티스푼, 수제 올리브 비누, 타소스 섬에서 채석한 대리석 조각, 천연 해면 스펀지와 퓨마이스 스톤, 바다 소금, 꿀, 허니 비즈 왁스로 만든 초 등을 나눠 가지며 크리스틴 나이젤의 시테르 섬에 대한 추억과 감상을 공유할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 아고라에서 열린 왁자지껄한 모임에 빠진 것 같은 와중에 드디어 운 자르뎅 아 시테르 향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스 햇살을 연상시키는 화사한 옐로 빛깔의 보틀과 그리스 예술가 엘리아스 카푸로스(Elias Kafouros)의 일러스트레이션이 삽입된 단상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향은 너무나 따사로웠다. 신선한 그린 노트와 상큼한 시트러스를 지나 부드러운 올리브나무 내음, 잘 익은 피스타치오 과육의 풍부하고도 충만한 내음이 어우러지면서 보틀 컬러를 닮은 황금빛 정원이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운 자르뎅 아 시테르의 향에 기분 좋게 취한 채 조향사 크리스틴 나이젤을 만나 새로운 향수와 그녀에게 영감을 준 그리스, 자르뎅 컬렉션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Q : 영화 〈비포 미드나잇〉과 〈맘마미아〉, 〈나의 그리스식 웨딩〉에서 본 풍경이 전부였는데, 처음으로 그리스를 방문하게 돼 기쁩니다
A : 그 모든 영화가 그리스의 현실과 풍경, 여유로운 생활방식, 문화, 전통 등을 떠올리게 하죠. 개인적으로 그리스 본토와 여러 섬을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그리스는 바다에 떠 있는 나라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섬이 곧 그리스라는 느낌 말이죠.
Q : 시테르 섬이 그중 하나겠죠? 시테르 섬 부근의 해상에서 아프로디테가 태어났다는 전설 때문에 이 섬이 사랑의 성지로 알려져 있어요. 〈그리스신화〉 속 이미지들이 이번 향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나요
A : 다양한 영감을 주는 섬인 건 분명합니다. ‘시테르’라는 이름 자체가 여행 초대장 같지 않나요? 프랑스어의 시적인 표현 중에 ‘시테르 섬으로 항해를 시작하려면’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뭔가를 처음 시작할 때의 느낌, 사랑에 빠지거나 처음 데이트할 때의 느낌, 멋진 여행이 시작되는 설렘 등이 연상됩니다. 제가 처음으로 시테르 섬을 발견했을 때 느꼈던 감정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아프로디테가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키티라 섬은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의 배경이 되는 곳이죠. 제가 창조물(향수)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아마도 무의식적 암시를 주고 이를 통해 해부학적인 은유를 떠올리게 했을 겁니다. 올리브나무로 여신의 척추를, 황금빛 목초로 금발을, 신선한 피스타치오로 육신을 만들어내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Q : 와우, 놀라운 메타포입니다. 향을 뿌리자마자 황금빛 아우라가 감싸는 이미지를 연상했는데 당신의 해부학적 은유를 들으니 향이 더욱 선명하게 가시화되는 느낌이에요. 운 자르뎅 아 시테르를 만들면서 떠올린 그리스 정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줄 수 있을까요
A : 햇살을 머금은 올리브나무가 들풀에 둘러싸여 바다 쪽으로 기운 채 쭉쭉 뻗어 자라는 너른 들판, 유구한 역사가 깃들어 있는 깊고 푸른 바다, 작열하는 태양과 맑은 하늘의 강렬한 푸른색 등의 이미지입니다. 그리스 섬에 도착할 때마다 여러 번 보았고, 볼 때마다 감탄했죠.
Q : 사실 ‘자르뎅(정원)’이라는 개념은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아파트 생활을 하니까요. 하지만 최근 도시인 중에서 자신만의 작은 정원을 꾸미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추세입니다. 인간에게 정원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요
A : 종류나 크기와 상관없이 모든 정원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한 은유이자 우화적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생각해 보세요. 그 정원에는 질서와 이성에 대한 데카르트의 사상이 멋지게 표현돼 있잖아요? 저는 모든 현대인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정원에서 이야기를 듣고 명상하는 시간을 가질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자유를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공간이자, 무한한 감정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Q : 자르뎅 컬렉션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향을 통해 정원에서 명상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A : 팬데믹을 거치면서 진정한 자유와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정원이 간절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자르뎅 컬렉션은 자연과 문화, 실제와 상상 사이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할과 가치가 있는데 이는 저뿐 아니라 에르메스 하우스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부터 이집트(운 자르뎅 수 르 닐), 중국(르 자르뎅 드 무슈 리), 튀니지(운 자르뎅 메디떼라네) 등 다양한 곳의 영혼과 조향사의 영감, 에르메스의 정신이 만난 결과물이 자르뎅 컬렉션이니까요.
Q : 자르뎅 컬렉션에는 이전 조향사였던 장-끌로드 엘레나의 대표작이 많습니다. 그 뒤를 이어 당신만의 자르뎅 컬렉션을 창조하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나요
A : 에르메스 하우스에는 수많은 면면이 존재합니다. 앞으로도 이어질 에르메스의 역사 속에서 저는 아주 찰나를 구성하고 있어요. 장-끌로드 엘레나가 구성한 자르뎅 컬렉션과 에르메상스, 코롱 컬렉션과 상관없이 여기엔 나만의 자리가 있습니다. 모든 창작물에서 에르메스가 지켜온 프랑스식 향수의 전통과 가치를 이어가면서 동시에 색다른 것을 찾으려 합니다. 조향사와 그 결과물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이야말로 에르메스가 보여주는 놀라운 점이죠.
Q : 팬데믹으로 많은 사람들이 ‘땅’을 연상시키는 얼시(Earthy) 노트나 ‘살’을 연상시키는 머스키, 파우더리 노트를 더 많이 찾는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좀 더 본능적인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 같은데요. 이런 대중의 니즈를 감안할 때 자르뎅 컬렉션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A : 이런 질문을 접하니 우리가 얼마나 주변 현상을 합리화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네요. 저는 사람들이 동물적으로 회귀하려는 본능적 충동을 회피하고 심지어 두려워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합리화와 이론화를 통해 스스로 안심시키는 거죠. 사람들이 땅이나 살의 냄새를 느끼고 싶을 때, 꼭 그런 개념화된 노트의 향을 맡아야 할까요? 차라리 땅을 만지고 살을 만지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향수는 개념을 전달하는 ‘차가운’ 제품이 아닙니다. 저는 향에 대한 특정 개념을 제시하는 걸 거부하는 조향사입니다. 고정관념을 지우고 향에서 전해지는 감정과 감각을 자유롭게 느껴 보길 바랍니다.
Q : 향이 불러일으키는 개인적인 감상과 감정에 충실할 것. 저 역시 간과했던 부분인 것 같습니다. ‘이 향은 이런 이미지, 저 향은 저런 이미지’라고 개념화하고 도식화해서 기사를 쓰곤 했으니까요
A : 저는 향수에 꿈과 기억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향수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건, 언젠가 그 냄새를 맡아본 적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어머니의 냄새를 기억하고, 수 년에 걸쳐 풀과 종이, 잉크 등의 냄새를 기억해 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만의 거대한 ‘향기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거죠. 그 안의 수천 수만 가지 향을 통해 새로운 감정과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조향사라는 직업의 장점이에요.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열망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운 자르뎅 아 시테르를 사용하는 모든 분도 자신만의 향기 아카이브 속에서 어떤 레퍼토리가 떠오르는지, 개인적 감각에 집중해 보길 바랍니다.
Q : 그래서일까요? 운 자르뎅 아 시테르는 소위 ‘시트러스’ ‘그린 ‘플로럴’ 등 향의 카테고리를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리스의 압도적인 유적들이 비밀스럽게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 푸른 바다와 하늘, 따스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 청량한 공기 등이 한데 어우러지는 이미지가 햇무리처럼 눈앞에 아스라이 펼쳐질 뿐이에요
A : 향수는 독특한 연상력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야기를 전하고, 움직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여행 기회를 제공하며, 사람들의 상상력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 조향사의 의무라고 느꼈습니다.
Q : 마지막으로 자르뎅 컬렉션 중에서 당신의 ‘최애’ 향은 무엇일까요
A : 놀랍게도, 없습니다. 자르뎅 컬렉션뿐 아니라 제가 만든 다른 에르메스 향수 중에도 특별히 어느 하나에만 애정을 기울이지는 않습니다. 향수 제품 하나하나가 제 인생의 한순간과 직결돼 있으니까요. 조향사로서 경력을 쌓고 더 많은 경험을 쌓게 해주는 매 순간의 결과가 그 향수들입니다. 대중에게 많이 언급되는 향수부터 덜 알려진 향수까지, 모두 소중하기에 그중 어느 하나를 콕 집을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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