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답사단·회지 발행·평양부친묘소 참배
[김삼웅 기자]
▲ 남과 북, 그리고 중국으로 찢긴 동농 김가진의 가족묘 |
ⓒ 유영호 |
기념사업회의 주요 목적사업 중에는 청년 학생들에게 참다운 역사교육을 실시하는 일이 포함되었다. 역대 보수정권에서 독립운동사가 소홀히 취급되고 지나친 입시와 취업경쟁으로 학생들의 관심이 멀어지고 있었다.
기념사업회는 발족 이후 2015년부터 해외 항일독립운동의 현장을 찾는 답사단을 조직하여 중국관내는 물론 만주·러시아·일본 등을 15회에 걸쳐 연인원 1천여 명의 청년 학생들에게 현장 교육을 실시하였다. 대부분 대학생과 대학원생으로 구성되고 전문 강사가 함께하여 현장에서 강의를 곁들이는 프로여서 인기가 꽤 높았다.
김자동 회장은 여러 차례 동행하며 때로는 '임시정부의 소년'으로 보냈던 현장에서 강의나 회고담을 들려주었다. 한 답사팀에 평균 50~60여 명이 참가하고 활동하여서 '21세기 광복군'이라 자부하기도 하였다.
기념사업회는 기관지 <독립정신>을 발간했다. 월간 또는 격월간으로 통상 100쪽 안팎이었으나, 알찬 내용으로 찾는 사람이 많았다. 편집기획이나 제작은 별도의 편집위원회에서 전권을 갖고 자율적으로 운영하였다.
필자 중에는 학계나 언론계의 전문가는 물론 민족운동·통일운동·노동운동 등에 참여한 중견 인사들도 참여하였다. 생존 독립운동가와 유족·유족단체들의 기고문도 적지 않았다. 시의에 맞고 참신한 기획이나 특집호는 추가로 인쇄한 적도 있었다.
기념사업회의 독특한 아이디어 상품은 〈100년 편지〉이다. 임정수립부터 100주년이 되는 2019년까지 편집부에서 선정된 필자가 자유롭게 대상을 선정하여 쓰는 형식의 칼럼이다. 대상은 임시정부 주석이어도 되고 누구라도 상관이 없다. 2000년 4월부터 매주 한통씩 국민을 대상으로 품격있는 글을 발표하였다. 많은 반응이 따랐고, 여타 기관에서 유사한 행사가 나타나기도 했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납북된 독립운동가들이 적지 않았다. 해방이 이들에게는 이산가족이 되는 비극을 안겨 주었다. 김자동의 아버지도 6.25 당시 납북되고 이후 생사를 알기 어려웠다. 간혹 국내외 언론에 납북인사들의 동정이 보도되었으나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정보였다.
1991년 모친이 별세하면서 김자동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하였다. 어머니가 간절한 남편과의 상봉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으면서, 이제 그 역할이 아들에게 전해졌다. 다른 이산가족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념사업회는 창립 이후 애국지사 후손들의 방북 성묘를 추진하였다. 김대중 정부가 집권하면서 막혔던 남북대화의 물꼬를 틔우고, 노무현 정부에서 마침내 성사되었다. 2006년 9월 30일부터 10월 4일까지 4박5일 동안 6.25 당시 납북된 애국지사 후손들의 성묘단이 꾸려졌다.
김자동은 이 사업에도 중심에 섰다. MBC 통일방송협력단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족들이 평양을 방문하였다. 방문단은 서영훈 단장을 비롯하여 김규식·윤기섭·조완구·최동오·김상덕·안재홍 선생의 유족 28명과 관계인사 등 50여 명이다. 김자동은 가족과 함께 대전현충원 어머니 묘에서 퍼온 흙 한 줌을 안고 평양 용궁동 재북인사 묘역을 찾았다. 아버지는 이곳에 묻혀 계셨다.
〈김의한 선생,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 1900년 2월 6일생, 1964년 10월 9일 서거〉라는 묘지 비석에서 아버지의 서거일이 밝혀졌다. 가족은 눈물로 아버지 묘소에 큰 절을 올리고 현충원에서 퍼온 흙을 뿌렸다. 부부는 이렇게 생소한 이역에서 해후하였다.
임시정부의 고문 할아버지 동농 김가진의 상하이 만국공묘의 묘는 이른바 중국문화혁명 시기에 파괴되어 행방을 찾기 어렵게 되고, 광복군 아버지 김의한의 묘는 평양 재북인사 묘역에 그리고 조선의 잔 다르크 어머니 정정화는 대전국립현충원에 묻혀 '죽어서 이산가족'의 상징처럼 되고 있다. 이들 가족이 언제 한 곳에서 영면할 수 있을까.
이렇게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경위로 상하이 - 평양 - 대전에 흩어진 세 가족의 묘소는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의 오늘의 과제를 웅변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조국의 타오르는 아침을 맞게 될' 후손들을 위해 하나된 나라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주석 1)
귀국한 김자동은 <평양 성묫길, 기다림과 그리움의 반세기 2006 재북 애국지사 후손 성묘단>보고서에서 <남북간의 상호 성묘가 활성화되기를 바라며>라는 발간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유족 28명을 포함한 우리 일행 50명은 지난 9월 30일부터 10월 4일까지 4박 5일 동안 평양을 방문했다. 실제로 우리가 목적한 바의 성묘에 보낸 시간은 신미리에 있는 '애국렬사릉'과 용궁동에 있는 '재북인사묘'에 각각 1시간 남직한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뜻 있고 감격의 순간이었다.
몇 안 되는 고령의 유족들 빼고는 후손들 대부분은 그곳에 안장된 어른들을 생전에 뵙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묘 앞에선 모두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감격스러운 장면을 보였다. 우리 일행의 대부분은 최근에 와서야 선인들의 생사를 알게 된 것이며 묘지의 존재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6.15 선언이 있은 후 많은 사람이 북쪽을 방문했으며, 가족 상봉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성묘를 위한 방북으로 남·북 양쪽 당국의 허가와 공식초청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 성묘가 이루어진데 대하여 남·북의 관계 당국자에게 감사하다는 뜻을 거듭 표하는 바이다. 북측 민화협 관계자들은 우리 일행을 정중히 맞이했으며 평양 근처의 여러 명승지들을 안내해주었다.
북측은 또한 우리 일행을 위하여 환영과 환송 연회를 성대히 열어줬다. 나는 환송연의 답사에서 임정요인들을 생전에 예우했으며 사후에 훌륭한 묘소에 모신 것에 감사의 뜻을 표했으며 성묘를 하도록 초청해 주신데 대하여 진심으로 사의를 표했다.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성묘할 기회가 열리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사실 나는 생존 가족들의 면회와 더불어 상호 성묘가 차츰 현실화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이번 우리의 성묘가 그 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주석
1> 김창희, <내 나라에서 아침을 맞으며 - 수당 정정화와 함께 한 독립운동 100장면>, <조국으로 가는 길>, 153쪽, 서울역사박물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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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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