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한국인의 사후기억(postmemory)
한국인들의 삶은 고달팠다. 20세기가 시작된 이래 나라가 편할 날이 없었다. 우리 땅에 살면서도 안정된 정부를 가지지 못한 국민으로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어야 했다. 전쟁 후유증으로 재건의 과정을 거친 나라는 많았지만 한반도처럼 분단국가로 정치적 불안정과 냉전의 긴장 상태를 감내하며 불가능한 수준의 경제 발전을 이룬 국가는 없었다. 매년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30년 넘게 이어오며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은 국제기구로부터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유일하게 가장 짧은 기간 내에 원조를 해주는 국가로 거듭났다.
가난했던 가족과 국가를 위해 베트남 전쟁터로,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으로 기꺼이 국경을 넘었던 조부모세대가 보기에 베이비부머세대들은 경제적 호황을 누리며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해외여행 자율화를 누린 수혜자들이다. 그 베이버부머세대들은 비싼 등록금을 내고도 대학 캠퍼스에서 제대로 된 수업보다 시위를 더 많이 목격하고, 최루탄 파편과 고문으로 죽은 동기들을 보았으며, 광주에서 벌어진 믿기 힘든 끔찍한 사건들도 들었다. 그 부모세대가 보기에 지금의 20대, 30대, 40대 자녀들은 깨끗한 도시 공간에 카페가 널렸고 인터넷으로 모든 게 가능한 풍요로운 세상을 살고 있는데, 힘든 일도 싫고 아이도 낳지 않겠다니 이 나라 미래가 어찌 되려는지 걱정스러울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들의 사후기억을 연구한 미국 컬럼비아대 마리안 허쉬 교수에 따르면 전쟁과 집단학살을 경험하지 않은 후손들도 조부모, 부모세대의 경험을 과거의 사진, 증언, 이야기들을 통해 실제 자신들이 경험한 듯 기억하고 체화함으로써 같은 민족집단이 유사한 감정과 기억을 대물림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비록 세대마다 달라진 사회문화적 환경 때문에 다른 특성을 갖긴 하더라도 같은 민족이 비슷한 가치관과 민족성을 보이는 이유는 이 사후기억이 한 민족의 집단적 기억과 행동양식에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 이후 경험한 집단적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유하고 회복할 여력도 없이 한국인들은 지난 70여년간 세대 불문하고 삼각끈으로 발목을 함께 묶고 뛰어온 셈이다.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와 상처는 뒤처지고 낙오되면 안 된다는 강박, 패배에 대한 과도한 불안으로 우리의 자존감과 행복지수를 위협했다. 한민족의 ‘한’이라는 정서는 치유받지 못해 누적되고 억압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의 다른 이름이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 윤리를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해온 반면 한국인들은 민족을 통합하는 종교적·정신적 구심점이 다양하고 파편화돼 인간관계를 통해 공동체 의식을 다지려는 경향이 강했다. 혈연, 지연, 학연을 중요하게 여기는 연고주의, 친족과 지인을 등용하는 파벌주의에서 소속감을 느끼려는 성향도 만연했다. 공동체 의식은 빠른 변화와 발전을 견인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실제로 한국의 압축고도성장은 개인을 지우고 국가와 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맹목적으로 달려온 덕에 이뤄진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남들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다수가 가는 길을 따르는 게 생존에 유리하다고 믿는 체제 순응주의도 양산했다.
정치적 불안정 상태가 지속되면 다수의 사람은 사안을 단순하게 이해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양극단으로 갈리는 경향도 생긴다고 한다. 정서적 피로감 때문이다. 팔레스타인과의 긴장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 거주 젊은 세대 유대인들이 안보 문제에서만큼은 극우 성향을 보이고 미래의 평화적 공존에 회의적 태도를 보이는 비율이 급증하고 있다. 한국의 젊은이들도 정치적 사안에는 냉소적이거나 무관심하다.
사후기억은 집단적 트라우마를 정서적으로 내면화해 생존 방식과 가치관으로 전이한 것이기에 현재의 우리 상태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은 더 많은 휴식과 힐링이 필요하다. 근로자의 날이 법정공휴일이 아닌 근로기준법에 따른 유급휴일이 되면서 육체노동자인지, 공무원인지, 몇인 이상 사업장에 근무하는 근로자인지, 비정규직인지를 구분짓는 행복하지 않은 절반의 휴일이 돼버렸다. 80개국이 기념하는 근로자의 날이다. 오월에 아이와 부모를 위해 더 일해야 하는 처지라도 충분한 휴식이 있어야 올해의 남은 3분의 2를 완주할 기운을 얻는다.
우미성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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