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칼럼] 윤석열 외교, 내부 설득 실패하면 물거품 된다
윤석열 대통령 미국 의회 연설은 성공작이었다. 500여 명의 상·하원 의원은 글로벌 경제의 강자인 삼성전자·현대차·SK 총수와 함께 미국 땅을 밟은 한국의 지도자를 향해 43분 동안 23번 기립박수를 쳤다. 윤 대통령은 “내 이름은 몰라도 BTS와 블랙핑크는 알고 있을 것”이라는 ‘아이스브레이킹’ 농담으로 분위기를 장악했다. 최빈국 대한민국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최강국 미국을 압박해서 쟁취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70주년의 백미(白眉)였다. 매카시 하원의장은 “한·미 동맹을 더 강화하는 역사적 한 걸음”이라고 평가했다.
■
「 미국의 마음을 얻은 미 의회 연설
미국, IRA·반도체 후속조치 필요
일본, 진정성 있는 사과 표명해야
통합적 국정운영, 외교 성공 열쇠
」
미국은 한국 대통령이 정성을 쏟을 만한 특별한 나라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터지자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의 승인도 받지 않고 즉시로 참전을 결정했다. 맥아더 사령관이 6월29일 도쿄 극동군사령부에서 전용기로 수원에 도착했다. 한국군 일등중사를 만났다. 참호에 서서 적을 노려보는 그는 무기가 없었다.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 이곳을 지키겠다”고 했다. 맥아더는 감동했다. 선발대로 1개 연대를 급파했고, 합참에 요청해 지상군 2개 사단을 즉각 파병했다.(『6·25전쟁과 미국』 남시욱)
1950년 12월 중공의 참전으로 전황이 불리해졌을 때 영국의 애틀리 총리가 “한국에서 손 떼고 유럽 방위에 힘써 달라”고 했지만 트루먼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장진호 전투는 30만 중공군의 기습 인해전술, 영하 40도의 강추위에 맞선 지옥의 전장(戰場)이었다. 이때 부상당해 후송된 미군 병사들은 “다시 싸우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미국은 눈물겨운 혈맹(血盟)이었다.
윤 대통령의 5박 7일 국빈방문은 전 정권 때 흔들렸던 양국의 신뢰를 복원했다. 미국은 아시아 국가 가운데 최초로 한국과 확장억제를 논의하기 위한 상설협의체인 ‘핵협의그룹(NCG)’을 창설했다. 자체 핵무장이나 전술핵 배치를 요구해온 그룹은 불만이겠지만 북핵 위협에 빈틈없이 대비하려는 2인3각의 의미 있는 첫걸음이다.
이젠 국내에서도 적극적인 설득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래야 대미 외교의 성과를 국민이 체감하고 협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당과 긴밀해져야 한다. 야당은 애초에 ‘반대하는 당(opposition party)’으로 설계된 존재다.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나의 불완전함을 메꿔줄 것이다. 야당을 기피하면 민주주의를 하지 말자는 것이다. 압도적 과반수 의석으로 입법권을 쥔 야당의 협조가 없으면 외교 성과는 물거품이 된다.
윤 대통령은 일본·미국 정상과 만난 뒤 “굴욕외교” “최악의 빈손 회담”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통 크게 내준 것에 비해 받아낸 것이 빈약했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은 미국에 화끈하게 투자하고 일자리도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 기업에 타격을 줄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과학법은 고치지 않았다. 오죽하면 미국 기자가 바이든 대통령에게 “핵심 동맹국에 피해를 주려는 게 아닌가”라고 물었을까. 성의 있는 후속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기시다 일본 총리가 7일 답방한다. 윤 대통령은 일제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을 일본 전범기업에 물리지 않는 제3자 대위변제를 결단했다. 기시다 총리도 “통절한 사과와 반성” 정도의 표현으로 호응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백 년 전 일로 무조건 무릎 꿇어라 할 수 없다”고 해서 호된 비판을 받았다. 이럴 때 기시다 총리가 “백 번, 천 번이라도 무릎 끓을 용의가 있다”고 하면 어떨까.
지금은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위해 몸을 던지고 있는 윤 대통령을 각별히 배려해야 할 때다. 나치와 싸웠던 브란트 독일 총리는 나치 만행에 사죄하는 의미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 끓었다. 독일은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이지만 끝없는 사과로 세계의 신뢰를 얻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통일을 성취했고, 유럽의 리더가 됐다. 일본이 가야 할 길이다.
외교의 출발점도, 종착지도 내정(內政)이다. 국민 지지 없는 외교는 모래성이다. 내부 설득을 위한 통합적 국정운영은 필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진보였지만 집권 후 첫 통일부 장관에 강경보수인 강인덕을 임명해 보수를 안심시켰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 멤버는 수석만 임동원으로 교체했을 뿐 전 정권 때 임명된 비서관·행정관 전원을 유임시켰다. 서독의 겐셔 외교부 장관은 제3당인 자민당 소속이었다. 그런데도 정파를 초월해 사민당·기민당 정권에서 18년간 재임했고, 독일 통일의 산파역이 됐다. 파격(破格)의 지도자인 윤 대통령이 숙고하기 바란다.
윤 대통령의 귓전에는 미 의회의 뜨거운 환호성이 맴돌 것이다. 아쉽겠지만 당분간 잊어야 한다. 싸늘한 반대자의 마음을 돌리는 데 전력투구해야 한다. 자기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한 외교는 뿌리 없는 나무다. 내부 설득에 실패한 외교는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하경 대기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남친과 대만 여행 간 한국 여성, 호텔서 숨진채 발견…부검 결과 보니 | 중앙일보
- [단독]피해자 주장 임창정 회사, 사내이사는 '주가조작' 연루자들 | 중앙일보
- 뉴진스 ‘OMG’ 뮤비 충격씬…신우석, 대체 어떤 사람이야 | 중앙일보
- 임영웅 軍일화 또 터졌다 "늦깎이 입대한 내게 오더니…" | 중앙일보
- 손흥민, 7시즌 연속 두 자릿수 골 대기록...호날두와 어깨 나란히 | 중앙일보
- "대통령실서 전화" 또 폭탄 던져…與 흔드는 제어불가 전광훈 | 중앙일보
- "어릴 때 살, 키로 간다"…살찐 아이 두면 무서운 후폭풍 온다 | 중앙일보
- 이용식 "바로 윗선배 오니 활짝 웃네"…서세원에 마지막 인사 | 중앙일보
- "번 돈 쟤한테 다 줘"…임창정, 또 다른 '투자자 행사' 참석했다 | 중앙일보
- '6억' 생선 씨말리고 나무도 죽였다…한국 눌러앉은 공포의 철새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