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갈매기] 가장 하기 싫었던 체르니 연습이 준 의외의 수확
부산 지역 시민기자들이 일상 속에서 도전하고, 질문하고, 경험하는 일을 나눕니다. <편집자말>
[박은정 기자]
피아노를 취미로 하면서 언젠가 쳐 보고 싶은 곡이 생겼다. 이제 초보에서 살짝 벗어난 수준에서 말하기 좀 부끄럽긴 하지만 궁극의 목표니까 커밍아웃하자면, 낭만주의 작곡가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 Op.16이다. 손열음 피아니스트가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았던 대곡이다.
이 작품은 슈만이 당대 작가였던 호프만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 슈만이 호프만의 작품을 빌려와 자신의 내면을 표현했듯이, 이 음악을 들으며 나를 투영했다. 열정적, 성찰적인 갈등과 고뇌 같은 것들이 그림책을 쓰면서 내가 겪는 감정과 포개졌다. 언젠가는 내 손으로 꼭 연주해 보고 싶다는 꿈을 품는다.
하지만 지금 내 실력으로는 칠 수 있는 수준의 다른 곡들을 연습하면서 그 곡을 소화할 실력을 키워나가야 했다. 원장님은 우선 체르니 연습과 소나타부터 권하셨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울 때 가장 하기 싫었던 게 체르니 연습이었다. 하지만 지겹다고만 생각했던 체르니 연습곡을 다시 쳐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 것은 의외의 수확이었다.
▲ 연습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피아노 연습 |
ⓒ @cbyoung, Unsplash |
체르니로 음악교육을 하는 것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고 나도 나름의 의견이 있지만, 오랜 세월 피아노를 쉬다가 다시 체르니로 연습하면서 처음보다 손이 유연해지고 빨라지면서 힘을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은 분명한 변화였다. 치고 싶은 연주곡을 칠 때에도 연습한 힘이 보탬이 되어 주었다.
그림책은 글을 읽지 못하는 유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도, 읽어주는 어른에게도 문학의 즐거움을 동시에 전할 수 있게,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에 압축적인 은유와 메시지를 담아야 하는 장르다. 그런데 나는 그런 문장에 소질이 없다. 문장도 길고 설명과 묘사가 많은 편이다.
이런 내가 그림책을 쓰겠다고 덤볐을 때, 제일 먼저 부딪힌 난관은 문장 쓰기였다. 행갈이는 어떻게든 하겠는데 문장이 긴데다 설명적이었다. 치고 싶은 곡을 치기 위해 연습곡으로 기초를 다지듯, 그림책 문장도 그렇게 익혀가는 수밖에 없었다.
지도 작가님으로부터 동시 필사가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도서관에서 동시집을 빌려와 매일 일과를 시작하면서 한 편씩 베껴 써 보았다. 처음에는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하다 보니 재미가 없었다. 하면 좋아지겠거니 싶은 의무감으로 했다.
필사 노트가 쌓여갈수록 문장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세계를 관찰하고 대상을 포착하며 관점을 담는 것을 '눈동냥'한 것은 예상치 못한 덤이었다. 여전히 그림책 문장을 쓰는 건 어렵지만.
하지만 최근 참석한 합평회에서 문장이 좋다는 의견을 들었다. 어찌나 기쁘고 감사하던지. 처음에는 하기 싫었던 일이었지만, 그 시간을 견디며 해 오다보니 하고 싶은 일로 이어지는 길을 발견한 것 같았다.
대학교 입학 후 영어 공부를 거의 안 하고 있다가 취업할 시기가 다가왔는데, 서류통과의 기준이 토익 점수였다. 준비 없이 시험을 쳐 보니 500대 초반이 나왔다. 서류통과도 못할 수준이었다. 어떻게든 토익 성적을 만들어야 했다.
기초 단어조차 잘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취직은 하고 싶었고 해야 했다. 별수 없이 학원을 수강하고, 자습실에 늦게까지 남았다. 모르니까 어찌나 공부가 하기 싫던지. 아는 게 거의 없는 독해 지문의 단어들을 메리엄-웹스터 사전 인터넷 사전에서 일일이 검색해 뜻을 익히고, 발음과 강세를 듣고 따라 했다. 문장들을 꼼꼼히 읽고 뉴스를 입으로 따라 들으며 해석하고 읽고 문단 채로 외우고 집에 갔다.
힘겹고 답답해서 하기 싫은 날이 더 많았지만, 덕분에 고득점을 얻으며 웬만한 입사 전형에서 서류통과는 할 수 있었다. 그때 열심히 했던 덕분에 시간이 한참 흐른 작년 가을, 대학원 마지막 학기를 하며 영어 논문 과제가 쏟아질 때도, 지금 외국인 상대의 업무에도 은근히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처음 입사했을 때, 제일 처음 맡았던 업무는 일종의 잡무였다. 다들 OO 담당으로 각자의 고유 업무가 있는데 나는 문서분류하고, 수없이 회의자료를 만들고, 남의 업무 지원을 도맡으라니 자존심도 상하고, 하기 싫었다. 그래도 어떻게 들어온 회사인가. 일 못한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아서 시키는 일을 열심히 했다.
2년 가까이 문서를 분류하고 잡다하고 다양한 요구를 해결하다 보니, 우리 부서와 관련 부서 또는 대외에서는 어떤 일이 있고, 누가 어떤 일을 하며, 규정 적용이나 예산 배분이 어떻게 되는지 전체적인 부서 업무의 흐름을 알 수 있었다.
드디어 바라던 OO 담당이 되었을 때, 그 시간의 덕을 봤다. 전체를 파악하고 흐름을 익힌 시간이 내 일을 원활하게 처리하거나 다른 사람과의 협업에 도움이 된 것이다. 차별성을 갖추고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었던, 웬만한 일에 겁을 먹지 않게 된 건 하기 싫은 일을 꾸준히 해 온 덕분이 아니었을까.
연재만화 <피너츠>(Peanuts, 주인공 찰리 브라운보다 더 유명한 개 캐릭터 스누피가 등장하는 만화)를 그린 만화작가 찰스 슐츠 또한 한 만화잡지에서 만화 속 의성어나 의태어를 멋진 글씨로 바꿔주는 작업으로 만화 관련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무려 50년 넘게 이어져 온 유명 만화의 작가 또한 하고 싶은 만화를 처음부터 그릴 수 있었던 건 아니었던 셈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둘은 동떨어진 것 같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 있기도 하고 동전의 양면 같이 결국 하나이기도 했다. 어릴 때는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른이 되면서 여러 경험을 해 보니, 하기 싫은 일을 버티며 하다보니 결국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요즘도 체르니는 종종 지겹다. 얼마 전에는 평소 좋아하던 슈베르트 즉흥곡을 배웠는데 체르니를 치며 했던 빠른 연습이 큰 도움이 되었다. 여전히 어마어마하게 멋지고 감동적인 문장은 쓰지 못하지만 좋은 문장들을 베껴 써 보고, 내 문장을 연습하는 동안 조금씩 편안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일일이 사전에서 의미를 찾고 소리까지 들어봐야 했던 내가 그럭저럭 전공논문을 사전 없이도 읽게 되고, 잡무를 봤던 시간이 업무에 차별성을 더해 준 것처럼, 하기 싫은 일을 하는 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할 기회는 천천히 다가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하기 싫은 일을 마주하면 내일 하고 싶은 일의 연습곡이라 생각하며 자세를 고쳐 앉아 본다. 하기 싫은 연습이지만 충실할수록 본격적으로 연주할 곡을 치기는 더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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