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키다리 아저씨가 왜 거기서 나와?[개척자 비긴즈]
나는 ‘개척자 Y’다. 험난한 교회 개척 여정 가운데 늘 기도하며 하나님께 ‘왜(Why)’를 묻고 응답을 구하고 있다. 개척은 그 자체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자 지향점이다. 출발선(A)에 선 개척자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Z)를 바라보며 묵묵히 걸음을 내디딜 때 당도할 수 있는 마지막 계단이 알파벳 ‘Y’이기도 하다. 그 여정의 열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람들이 TV 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일이’를 두 눈 휘둥그레 뜨고 보는 이유가 있다. 예측불가능성과 일상을 벗어난 기이함이 오묘하게 교차하기 때문이다. 교회 개척을 시작하면 일상 가운데 ‘세상에 이런 일이’가 펼쳐진다.
12월의 어느 저녁이었다. 세 식구가 식탁에 모여 앉았다. “아악!” 식사를 하던 아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무언가를 뱉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아내의 입에서 발사돼 손에 안착한 건 부러진 치아였다.
미안한 말이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신기한 일이 벌어지니 나와 딸은 눈치를 보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며칠 뒤 함께 치과를 방문했다. 진료를 받는데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심상찮다.
“단순히 부러진 게 아니네요. 임플란트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오 마이 갓. 식탁에서 위로하진 못할망정 웃음을 참고 있었던 모습이 그리 한심할 수 없었다. “여보. 견적도 그렇고 치료 기간을 보니 치과 한 곳이라도 더 방문해서 비교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굳어진 아내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수소문 끝에 한 치과를 찾아 진료를 봤다. 역시 임플란트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6개월 정도 소요될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게다가 사랑니 발치, 금니에 구멍이 난 치아 치료 등 갈 길이 멀었다. 비용은 더욱 만만치 않았다.
우선 가지고 있는 것들을 팔아서라도 치료비를 마련해야 했다. 1순위로 떠오른 게 있었다. ‘일단 가지고 있던 자전거를 처분하자.’
걱정하시던 부모님께 사실을 알렸다. 처분하려 했던 자전거 얘기부터 꺼내셨다. 내 무릎이 좋지 않아 재활을 위해 마련한 자전거인데 팔아선 안 된다며 손사래치셨다. 그러곤 모아두신 돈을 보내주셨다. 임플란트 치료를 위해 딱 필요한 금액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부모님은 언제나 우리의 ‘키다리 아저씨’다.
아내의 사랑니를 발치하고 임플란트를 위해 부러진 이를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금니에 구멍이 뚫린 부분을 치료하려고 열어본 순간. 또 ‘오 마이 갓’. 아내의 치아가 전부 녹아 없어져 있었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엎친 임플란트에 또 하나의 임플란트가 덮쳤다. 계획이 변경됐고 치료비용은 추가됐다.
‘그래도 치료 기간을 넉넉하게 잡았으니 다행인거야.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 희망 회로라도 돌려야 했다. 하지만 시간문제일 뿐 언젠가 꺼야 하는 불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보이지 않는 압박의 사슬이 몸과 마음을 옥죄어 왔다. 압박의 수위가 높아지며 벼랑 끝까지 내몰리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휴대폰 화면엔 익숙한 이름이 떴다. 평소 존경해 오던 선배 목사님이었다.
“Y목사. 가정이 살아야 목사도 사는 거야.” 얼마 후 통장에 선배 목사님 이름이 찍혔다. 이름 옆엔 아내의 치아에 붙은 급한 불을 끄고도 남을 금액이 찍혔다. 그리고 얼마 후 카톡이 왔다. ‘사모 응원비야.’ 그렇게 개척자 가정의 위기 상황에 주님은 키다리 소방수를 보내주셨다.
개척자로 살아가는 동안 일상의 루틴처럼 듣는 인사말이 있다. “목사님 개척 준비는 잘 되어가세요?” 잘은 아니지만 조금씩 진행되고 있는 부분을 말씀을 드리면 다들 자신의 일처럼 걱정해주시고 응원해 주신다. 만날 때마다 나눌 수 있는 것들이 생겨 감사했다. 그리고 기도해주신다니 그것만큼 감사한 일이 없었다. 기도만도 감사한데 때로는 예상치를 훌쩍 벗어난 손길이 찾아오곤 한다.
예배를 위해 준비하며 필요한 것들 생겼지만 욕심을 부리진 않았다. 완벽하게 준비해두고 예배를 드리기보단 주신 것에 감사하며 형편대로 예배를 드리고 싶었다. 찬양예배를 준비하던 어느 날 알고 지내던 집사님께 연락이 왔다. 개척과 관련한 이야기보단 신앙상담, 이단 문제, 딸의 진로 등에 대해서 얘기를 주로 나누던 집사님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왠지 모르게 목소리에 굳은 결기가 느껴졌다.
“목사님 저희가 퇴직금 중간정산을 받았는데 목사님께서 준비하시는 교회에 십일조를 드리고 싶어요.”
그야말로 훅 치고 들어온 돌직구 같은 얘기였다. 집사님의 섬김으로 찬양예배 때 필요한 장비를 준비할 수 있었다. 개척 소식을 들은 거제도의 한 키다리 아저씨는 예배에 필요한 콘솔장비, 무선 마이크, 이동식 스피커를 준비해 보내주셨다.
아내에게도 연락이 왔다. 이번에도 알고 지내던 집사님이다. 쓰지 않는 태블릿 PC가 한 대 있는데 혹시 개척할 때 필요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개척예배 처소에서 태블릿 PC와 연동해 반주를 커버하면 어떨지를 구상하던 중이었다.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만 하며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채워졌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키다리 아저씨들이 시시때때로 나타나 개척자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줬다. “전화나 문자로 하면 목사님이 계좌번호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직접 찾아왔어요.” 내 성향을 AI처럼 파악하고 전략적이고 의도적인 만남을 준비하는 분들도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교제 나누고 응원을 받은 분들의 손길이 모여 예배에 필요한 살림들이 채워지고 또 채워졌다.
매주 딸을 가르쳐주는 선생님께서는 손수 준비해 오신 반찬을 스윽 내민다. 문 앞까지 와서 얼굴도 내비치지 않고 예쁜 글씨로 ‘개척을 응원합니다’라고 적은 포스트잇을 붙여 쌀을 투척하고 가신 집사님, 딸의 홈스쿨링 소식을 듣고 줌으로 영어 수업을 해주시는 집사님, 우리보다 먼저 개척한 교회에서 받은 사랑은 흘려보내야 한다며 보내주신 마음, 무엇보다 ‘기도하고 있어요’라고 말씀해주시는 성도님들. 이 모든 분들과 함께 개척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
기다리다 잊힐 때쯤 뜻하지 않은 순간에 걸려오는 전화, 예상못한 교제 속에 꽃 피는 도움의 손길, 멍하니 있을 때 툭! 하고 스마트폰 화면을 물들이는 ‘항상 기도하고 있다’는 메시지, 문 앞의 쌀 등을 돌아보니 내가 한 것은 없었다. 함께 만들어 갔고 주님이 주신 마음으로 흘러갔다. 외롭지 않고 두렵지 않고 기대가 된다. 오늘도 베풀어 주시는 매일이 감사하다. 하늘나라 ‘키다리 아저씨 센터’의 센터장인 하나님이 늘 개척자의 필요를 들여다보고 있다.(Y will be back!)
최기영 기자 일러스트=이영은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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