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홍범도 장군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서울을 그리는 어반스케쳐]

오창환 2023. 4. 30.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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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70년 만의 해후: 이응노와 박승무>

[오창환 기자]

 
 비오는 날, 대전현충원에 잠드신 홍범도 장군님을 만나 뵈었다.
ⓒ 오창환
   
일전에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에서 연락이 왔다. 기념사업회는 1년에 네 번, 분기별로 소식지를 발간하는데 앞으로 당분간 소식지 표지를 어반스케치 그림으로 했으면 좋겠으니 사업 내용에 적절한 그림을 선택해서 현장에 가서 그리고, 그러한 내용을 기사로 소개했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사실 나도 홍범도 장군 기념 사업회 회원이라 기꺼운 마음으로 그러기로 했다. 그래서 다음 잡지에 실릴 첫 번째 스케치는 대전 현충원에 모셔진 홍범도 장군 묘역을 그리기로 했다. 

홍범도 장군님은 1868년 평양 인근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당신 또한 머슴으로 생활하다가 16살에 군에 나팔수로 입대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 1897년 이후 산짐승을 사냥하는 포수가 되었는데, 조선 군대가 해산되고 일제가 민간인이 사용하던 총기류를 압수하려 하자 산포수를 규합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홍범도부대는 갑산과 해산진·북청 등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승리하였다. 한일합병 후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로 이주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북간도에서 대한독립군을 결성하였으며, 갑산군 금정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독립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1920년 6월에는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을 맞이하여 크게 승리하였으며, 10월에는 청산리전쟁에 참가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부대를 이끌고 흑룡강 자유시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았으나, 러시아 측의 배반으로 이른바 자유시참변을 겪게 된다. 1937년 스탈린의 한인이주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되어 이곳에서 극장 수위 등으로 일하다가 해방을 2년 앞둔 1943년 76세로 사망하셨다. 2021년 광복절 카자흐스탄에서 봉환된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됐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25일 아침에 눈을 뜨니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스케치를 뒤로 미룰까 하다가 이미 기념사업회 대전모임과 약속도 있었고, 비가 곧 그치겠지 생각하고 대전행 KTX에 몸을 실었다. 기차를 타고 내려가면서 읽은 책은 이 여행에 가장 어울리는 책으로 송은일 작가가 쓴 소설 <나는 홍범도>다.

홍범도 장군은 항일 투쟁을 하면서 어찌나 신출귀몰 했던지, 일본군이 그를 날으는 장군(飛將軍)으로 부를 정도였다. 장군님은 항일 무장투쟁을 하기 전에는 함경도에서 포수를 하면서 호랑이 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사람들은 호랑이에 대한 경외심으로 호랑이를 비호(飛虎)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여러모로 홍범도 장군님은 호랑이 같으시다.

기념사업회 측과의 약속이 1시 반이었지만, 오랜만에 대전에 가는 길이니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대전역에 도착하니 10시다. 대전역에서 606번 버스를 타고 이응노미술관에서 내렸다.

이응노미술관에는 마침 4월 25일부터 8월 13일까지 <70년 만의 해후: 이응노와 박승무> 전시를 하고 있었다. 동양화의 현대화에 천착한 고암 이응노(1904~1989)와 전통회화를 고수한 심향 박승무(1893~1980)의 전시다. 고암 선생님은 젊은 시절 전주에서 간판점을 운영하셨는데 가게 안에 심향선생님 사무소를 두고 개인전도 도와주셨을 정도로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다고 한다. 그래서 두 분의 관계에 착안해 만든 전시다.

현충원 가는 길에 미처 예상치 못한 이런  좋은 전시가 있다니! 티켓을 끊고 미술관에 들어가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응로미술관에 들어서니 은은한 나무 향기가 느껴져서 어디서 나는 냄새인가 하고 봤더니 미술관 천장과 벽 일부를 나무로 만들어 놓았다.
 
 이응노의 1969년 작 <당인리 발전소>. 구상회화와 추상화의 경계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작품이다.
ⓒ 오창환
 

심향 박승무의 그림은 전통 동양화였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림이다. 선친께서 동양화를 수집하셔서 집에 동양화가 많이 걸려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렸을 때 집에 걸려 있던 동양화 작품들과 비슷한 화풍이다. 아마도 박승무의 전통 동양화 화맥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어 그의 화풍을 따라 그렸던 작가가 많았던 것 같다.

미술관에서는 박승무의 작품과 함께 이응노의 초기 작품도 볼 수 있었다. 이응노의 작품은 문자추상이나 군상이 유명해서 그런 작품은 많이 봐왔지만 초기 작품은 처음 본다. 그런데 이응노는 젊은 시절의 초기 작품부터 일반 동양화와는 많이 다른 느낌을 받았다. 한마디로 모던하다. 

박승무와 이응노의 작품에서 실경을 그린 작품이 간혹 있는데, 나는 가상의 공간을 그린 작품보다는 실경을 그린 작품에 애정이 더 간다. 이응노의 <당인리 발전소>(1969)는 마포구 도화동에 있었던 자신의 집이자 화실인 도화산방에서 내려다본 풍경인데 구상화와 추상화의 경계선에 있는 그림으로 정말 인상적이었다.

 
 왼쪽은 대전 현충원 전경. 이 분들 덕에 대한민국이 살아있다. 오른쪽은 현충탑 조형물중 일부.
ⓒ 오창환
 
홍범도 기념사업회 대전 모임 오광영 공동대표을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오대표님 차를 타고 대전 현충원으로 갔다. 현충탑에 참배를 하고  홍범도 장군이 영면하고 계신 독립유공자 제3 묘역으로 가서 참배를 했다. 비가 계속 온다. 평소에는 참배객이 많은 대전 현충원인데, 오늘은 비가오고 추워서 드넓은 대전현충원이 적막했다. 장군님과 대화한다는 마음으로 우산을 쓰고 스케치를 했다. 비가 오니 채색은 집에 가서 해야 한다. 
참배와 스케치를 마치고 기념사업회 대전 모임 사무실에 들러서 홍범도 장군 유해 송환이야기며, 동상 건립 이야기, 홍범도 장군 사격대회 이야기등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오면서 생각했다. 어반스케처가 된 덕분에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현장에 직접 가서 그림도 그리고 역사공부도 하게 되니 얼마나 고마운가.
 
 애국지사 홍범도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 3 묘역에 자리하고 있다. 누군가가 커피와 꽃을 갖다놨다.
ⓒ 오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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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소식지 <날으는 홍범도>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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