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 밴드 '자우림'의 작명 비하인드

박수진 2023. 4. 30.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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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반, 다시 읽기] 자우림 1집 < Purple Heart >

최근 레트로 열풍에 발맞춰 1990년대 대중가요가 다시금 조명받고 있습니다. 장르 및 시대를 아우르는 과거 명반을 현재 시각에서 재해석하며 오늘날 명반이 가지는 의의를 되짚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박수진 기자]

1997년 대한민국은 삭막했다. IMF 구제금융이 한국을 뒤흔들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때 대중음악은 천천히 새 장르를 개척할 준비를 마친다. K팝과 인디. 1996, 1997년은 이 두 장르가 맹렬히 제 자리를 구축하던 시기다.

사람에 따라 그 시작을 1992년 서태지 데뷔로 보기도 하지만 1996년은 아이돌 그룹 H.O.T.가 데뷔했다는 면에서 명확히 K팝 역사에 한 획을 긋는다. 동시에 1996년은 크라잉넛, 노브레인 등으로 대표되는 인디 펑크록의 원년이다. 인디 문화를 처음 대중에게 알렸다고 평가받는 '스트리트 펑크쇼'나 최초의 '인디' 음반으로 회고되는 < Our Nation vol.1 >이 홍대 앞 펑크 클럽 드럭(DRUG)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자우림이 등장한 게 바로 이때다. K팝, 즉 아이돌 음악이 생기고 어른과 아이가 듣는 음악이 구별되며 인디, 즉 메이저와 마이너로 음악시장이 양분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

이들은 이 시기 홍대 앞에 막 똬리를 틀기 시작한 인디 클럽(그중에서도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이 중심으로 활동하던) 블루데빌에서 데뷔의 신호탄을 쏜다. 블루데빌의 선배 뮤지션, 유앤미블루의 공연을 보러 왔던 영화 <꽃을 든 남자>의 황인뢰 감독 눈에 띄어 단숨에 영화 OST 제작 기회를 얻는다.

고유명사화 된 '자우림'
  
 자우림 1집 < Purple Heart >의 음반 커버 이미지
ⓒ 코너스톤
 
지금도 사랑받는 데뷔 싱글 'Hey hey hey'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이 곡은 영화보다 더 '히트(?)'했다. 덩달아, 자우림도 히트한다. 결성 초 '미운오리'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영화 크레디트에 올리기 위해 급하게 지은 '자우림(紫雨林, 자주색 비가 내리는 숲)'이란 활동명이 이내 곧 고유명사화됐다.

인디 클럽을 통해 메이저 무대 데뷔 기회를 잡은 이들은 이후에도 꾸준히 인디와 메이저의 경계를 오갔다. 대중에게 알려지고, 많은 히트곡을 쓰고, 매스컴에 주기적으로 노출됐다는 면에서 메이저에 가깝고, 꾸준히 모든 걸 직접 한 D.I.Y 자세는 인디에 더 가깝다. 이들은 보컬 김윤아를 주축으로 전곡을 스스로 썼다. '인디', '마이너'를 나누는 게 시쳇말로 요새 표현에 맞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인디 정신을 놓지 않았다. 보다 선명하게 스스로 내 것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스쿨 밴드 출신 멤버 이선규(기타), 김진만(베이스), 구태훈(드럼, 현재 활동 중단)과 메탈 음악 애호가이자 당시 PC 통신 음악동호회인 '우드스탁' 등에서 활동하던 김윤아가 뭉쳐 낸 데뷔 음반 < Purple Heart >에서부터 선명한 색을 드러냈다.

'자주색 심장'으로 해석되는 음반 명은 자주색이 풍기는 묘하고 비릿한 인상만큼 다채로운 감정을 노래한다. 연인을 죽이고 즐거워하는 듯한 내용을 담은 첫 곡 '밀랍천사'나 외로운 감정을 '레몬과자', '체리 샴푸' 등에 비유해 노래하는 '파애', 어딘가 서글프고 비장미 넘치는 '안녕 미미'를 비롯해 지금까지 큰 사랑을 받는 대표곡 '일탈' 역시 이 음반에 수록되어 있다.

여성 중심 밴드가 탄생하기까지
 
 자우림의 9집 'Goodbye, greif' 발표 기념 기자간담회(자료사진).
ⓒ 연합뉴스
 
엉뚱 발랄한 가사, 어둡고 파괴적인 마음과 유쾌한 감정을 교차해 적는 등 오늘날 자우림이 가진 음악적 특징이 이 작품에도 잘 담겨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음악을 표현하는 보컬 김윤아의 창법이다. 이즈음 그의 창법이 1990년대경 전 세계적 인기를 끈 아일랜드 밴드 크랜베리스(Cranberries)의 돌로레스 오리어던(Dolores O)과 비슷하게 다소 낙차 큰 목소리 운용을 보여줬다면 현재 김윤아의 노래하기는 이때에 비해 한결 편안하고, 연륜이 묻어 짙어졌다.

사실 돌아보면 1990년대는 K팝, 인디 등 대중음악사 장르가 샛길을 냈을 뿐만 아니라, 그간 존재가 미비했던 여성 중심 밴드들이 우후죽순 쏟아지던 시절이기도 했다. 김윤아가 있는 자우림, 박혜경이 활동한 더더, 조원선이 그룹 색을 만든 롤러코스터, 주다인의 주주클럽이 탄생한 게 모두 이때다. 1990년대 말 기지개를 켠 PC 통신은 '록'이 여성에게 가 닿을 기회를 줬고, 때마침 탄생한 인디 신이 이들의 끼를 발산할 발판이 돼줬다. 

더하여 1990년대 해외 여성 (록) 스타 앨라니스 모리셋, 카디건스(Cardigans, 니나 페르손이 보컬) 등의 인기도 여성 중심 밴드 탄생에 일조했다. 비슷한 시기 릴리스 페어(Lilith Fair)나 라이엇 걸(Riot Girrl) 무브먼트 역시 모두 같은 시대적 흐름 아래 놓인다.

1997년 자우림에 데뷔는 따라서 아주 역사적이다. 그들의 데뷔 음반을 곱씹으면 당대 한국 대중음악의 시류와 더 넓게 해외 음악 신의 경향도 판단 가능하다. 마치 온 세상이 이들의 시작을 위해 준비를 끝낸 것만 같았다. 성기게 형성되던 인디, 여성 록 시장에 당차게 내 이야기, 내 색을 들고나온 자우림의 출발. 이제는 대한민국 대표 밴드가 된 자우림의 녹슬지 않은 그때 그 시절이 < Purple Heart >에 생생하게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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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대중음악 웹진 이즘(www.izm.co.kr)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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