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서 집필자가 일본에 붙은 역적 되다니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육당 최남선 |
ⓒ 위키미디어 공용 |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냐 요게 무어야"로 시작하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육당 최남선이 만 18세 때인 1908년 11월 <소년> 창간호에 권두시로 실은 작품이다.
이 시를 쓴 최남선은 11년 뒤인 1919년에는 3·1 독립선언서 집필도 맡았다. 29세 때인 이 당시의 활약은 일제 재판 기록에도 묘사돼 있다. 1972년에 원호처(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5권에 담긴 재판 기록은 "각 서면의 기초는 최남선이 이를 담당"했다고 말한다. 민족대표 33인 명의로 발표될 독립선언서·의견서·청원서 등의 집필을 그가 맡았다는 것이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7권은 "1920년대 들어와 최남선은 <심춘순례><백두산 근참기> 등을 집필하면서 조선의 역사와 지리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했으며, 아울러 단군 연구에 많은 성과를 낳았다"고 한 뒤 "그러나 그는 1928년부터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했다고 설명한다.
식민사관에 입각해 한국사를 재편성하는 조선사편수회였다. 거기에 들어간 것은 역사상 최악의 착취 시스템인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역사 왜곡에 가담하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친일 인생으로 평가됐다.
1890년 4월 26일 한성부에서 출생한 최남선은 12세 때인 1902년 경성학당에 들어가 일본어를 배웠다. 대일본해외교육회가 1896년 설립한 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그 뒤로도 그와 일본의 학연은 계속 이어졌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최남선 편은 이렇게 서술한다.
"1904년 10월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했다. 같은 해 11월 도쿄부립 다이이치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2월에 그만두었다. 1906년 3월 다시 일본 유학을 떠나 4월에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역사지리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했다."
학교를 번번이 그만둔 것은 집필과 출판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와세다대학 재학 중에도 대한유학생회 회보의 편집을 맡았다.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한 뒤인 1907년 5월에는 신문관(新文館)이라는 출판사를 설립했다. 이듬해에는 잡지 <소년>을 창간했다. 국권 침탈 직후인 1910년 10월에는 조선광문회라는 출판사를 세웠다.
독립선언서 작성으로 인해 2년 8개월간 복역하고 나온 뒤인 1922년에는 동명사라는 출판사를 세웠다. 이듬해에는 일간지 <시대일보>의 인가를 받아 사장 겸 주간으로 활동했다. 새로운 출판사를 거듭 세운 것은 경영이 잘되지 않았으나 남의 눈치 안 보고 글을 발표하는 것에 대한 집념이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필요한 자금과 편의 얻고자 친일로 돌아서
이런 가운데 역사학 연구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37세 때인 1927년에 발표한 '불함문화론'이 그중 하나다. 1993년에 발행된 <친일파 99인> 제2권에 실린 박성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기고문 '최남선: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문 기초자'는 이 논문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일인 학자들의 단군 말살론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며 "이로 인해 조선인의 반일 여론이 비등"했다고 평했다.
이렇게 일제에 맞서 단군을 지키고자 했던 그가 바로 이듬해에 조선사편수회로 들어갔다. 이로 인해 그가 어떤 시선을 받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가 '불함문화론'을 저술한 해에 상하이에서 체포돼 징역 14년형을 받고 투옥 중이던 독립운동가 겸 유학자인 심산 김창숙이 감옥에서 그를 향해 개탄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박성수 기고문에 따르면, 일본인 간수가 수감 중인 김창숙에게 최남선의 <일선동조론>을 읽어보라고 건넸다. 김창숙은 "도시 이런 흉서가 있는가!"라고 개탄하며 책을 비틀어 던져버렸다. 꼿꼿한 선비의 전형으로 칭송되는 김창숙은 "기미 독립선언서가 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던가"라며 "이런 자가 도리어 일본에 붙은 역적이 되다니 만번 죽어도 그 지은 죄는 남을 것이다"라고 개탄했다.
최남선도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간 것이 자신의 약점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번 죽어도 그 지은 죄가 남을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를 보여주는 게 1949년 2월 7일 국회 반민특위에 체포돼 수감된 뒤에 집필한 '자열서(自列書)'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이 욕을 먹게 된 계기가 "조선사편수위원의 수임(受任)에 있다"라며 이렇게 서술했다.
"무슨 까닭에 이러한 방향 전환을 하였는가. 이에 대하여는 일생의 목적으로 정한 학연(學硏) 사업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그 봉록과 그리로 서 있는 학구상 편익을 필요로 하였었다는 이 외의 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공부하고 글 쓰고 출판하는 일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탓에 고정 수입과 학문적 편의가 필요해서 조선사편수위원이 됐다고 말한 것이다. 학교를 번번이 그만두면서도 집필을 계속한 사실, 출판사를 연이어 세우면서 자기 글을 계속 발표한 이력을 감안하면, 집필과 출판에 필요한 자금과 편의를 얻고자 친일로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조보다 학문이 더 좋다고 말했다. "지조냐 학서(學書)냐의 양자 중 그 일(一)을 골라잡아야 된 때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으라고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라고 술회했다.
학자 겸 출판업자의 길을 유지하기 위해 지조를 버렸다는 진술은 솔직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애당초 독립운동에 큰 뜻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독립선언서 같은 중대 문건을 작성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다소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렇게 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친일로 학자의 지위와 경제적 이익도 얻어
최남선은 학자의 길을 걷고자 친일파가 됐다고 말했지만, 그는 학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길을 서슴없이 걸었다. 위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는 "1940년 항일무장투쟁세력에 대한 투항 권유를 주요 임무로 했던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약 21개월 동안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주임관 대우)를 지냈다", "학병 지원을 선전·선동하는 기고 활동을 했다"라고 열거한다.
그는 한국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았을 뿐 아니라 중추원 참의가 되어 총독부에 자문도 제공하고, 만주 지역 독립군에 대한 투항 권유 활동에도 가세했다. 흥아보국단·조선임전보국단 등에 참여해 침략전쟁을 지원한 것들을 포함해 그의 친일 행위는 이만저만 많은 게 아니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도 글을 기고해 일본의 선전전에 가담했다. 1938년부터 5년간은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국립대학 교수로도 활동했다. 만주 건국대학 교수가 되어 일본 이념을 전파하는 데도 앞장섰다.
학자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그렇게 했다고 변명했지만, 친일이 그에게 그런 이익만 준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경제적 이익도 함께 제공했다.
그가 중추원 참의 재직 중에 벌어들인 월수입은 100원이다. 1938년에 서울 편창제사방직주식회사 노동자는 식사 제공에 월 3원 내지 7원을 받았다. 그는 건국대학 교수가 된 뒤에는 훨씬 더 많은 수입을 벌었다. 한국 친일파 연구의 기초를 닦은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에 이런 대목이 있다.
"중추원 참의를 그만두고 만주국 건국대학으로 간 최남선은 '최남선의 보수'(<삼천리> 1939.1)에 의하면 '학교에서 교수로서 매월 800원 그리고 서울 매일신보사에 집필 원고로 하여 매일 8원씩 합계 240원을 받아 합하여 1040원'이었다는데, 이밖에 '최근에 만선일보에 취임하였으므로 거기서도 보수를 받기로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니 연수입 약 1만 5천원 내외."
서울의 공장 노동자 월급을 감안하면 그가 친일의 대가로 얻은 수입은 일반인들이 괴리감을 느낄 만한 것이었다. 일제가 그만한 사례를 한 것은 그의 글들이 한국인들의 정신을 무장 해제시키고 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데 유용했기 때문이다.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라는 시구처럼 그의 글은 식민지 한국인들의 정신과 마음을 철썩 철썩 때리고 부수는 데에 활용됐다. 그래서 그만한 봉록과 편의가 친일파 최남선에게 제공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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