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거' 말고 진짜 잘 살고 싶어요

김지원 2023. 4. 30.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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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책방] 김영민 교수 책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지원 기자]

벚꽃이 만개해 세상이 연분홍빛으로 뒤덮였다. 비가 내리자 벚꽃나무 가지만 남았다. 오랜만에 해가 떠 있는 시간에 퇴근하니 회사 앞에 안 보이던 철쭉들이 진분홍 길을 만들었다. 친한 친구들이 갑자기 결혼 소식을 알려온다. 너무 짧은 주기로 세상의 변화를 느끼는 요즘이다. 계절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고 관계도 변한다. 변화는 필히 허무를 데려온다. 시간의 주름 속에 허무를 숨겨 놓는다.

혼란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문제는 정신승리가 현실승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승리는 정신의 공갈 젖꼭지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정상속도를 답답하게 느낀다. 영화도 유튜브도 1.5배속, 1.75배속 재생이 아니면 시간 낭비라고 느낀다. 빠름에 익숙해진 일상에서 잠시 정상 속도로 돌아오면 소위 "현타(현실자각타임의 줄임말)"를 맞이한다. 약간의 멀미,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정신승리를 스스로에게 처방한다. 
 
 책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표지 사진.
ⓒ 사회평론아카데미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저자 김영민 교수는 정신승리를 정신의 공갈 젖꼭지라고 했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으니 임시로 공갈 젖꼭지를 물린다. 현실 승리가 아니란 점에서 임시방편이오, 다시 터져 나올 울음인 걸 알지만 정신승리로라도 스스로를 돌볼 수 있다면 다행인 일일까.

"레이먼드 카버 소설 <대성당>에서 맹인은 눈 뜬 이에게 뭔가 믿는 게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눈 뜬 이는 답한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그래서 힘들다고. (...) 눈을 뜨면 삶의 수단이 보일지 몰라도 삶의 목적은 보이지 않는다. 삶의 목적을 보기 위해서는 묵상해야 하고, 묵상하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 한다."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평소 중요하지 않은 많은 시각 정보들을 처리하느라 정작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오늘날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 환자가 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세상에 너무 많은 자극이 있어서 몰입과 집중이 어려워졌기 때문. 내가 지금 이렇게 산만한 삶을 사는 것은 혼란한 세상 때문이라고 정신의 공갈 젖꼭지를 물려본다.

"희망은 답이 아니다. 희망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상태가 답이다. 희망은 희망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가끔 필요한 위안이 되어야 한다."

"나는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 나는 목적보다는 삶을 원하므로. 꼭 목적이 없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원한다. 나는 삶을 살고 싶지, 삶이라는 과제를 수행하고 싶지 않으므로."

행복조차 추구하고 싶지 않다는 저자의 말

대개 우리는 ○○이 있는 삶을 소망한다. 돈이 많은 삶, 행복이 가득한 삶, 인정받음이 있는 삶, 편안함이 있는 삶 등. ~없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은 잘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의 삶은 결핍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없는 삶을 바라는 건 무욕의 삶 또는 이미 그것이 차고 넘치는 삶일 때 가능하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우리는 무언가를 원하고 성취하고자 한다.

사실, 무엇이 없어도 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충족이 전제되어야 한다. 저자가 책에서 말했듯 지나친 궁핍에 몰리면 생존이 삶의 목적이 되고, 시험에서 9수를 하면 합격이 삶의 목적이 된다. 그래서 ○○ 없는 삶을 바라는 건 ○○이 이미 있는 삶을 바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지점에서 또 허무를 느낀다. 멋들어져 보이는 말도 결국은 배부른 소리임을 깨달았을 때 오는 허무랄까.

그럼에도 저자의 자세는 벤치마킹하고 싶다. "삶을 살고 싶지, 삶이라는 과제를 수행하고 싶지 않으므로." 너무 멋진 말이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 그런데 저 말을 곱씹어보니 전자와 후자가 환경적, 물리적 조건으로는 같은 말이 아닌가 싶다. 결국 이 역시 자기 합리화랑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래도 삶은 사는 거지 과제 수행하는 게 아니라고 믿을 때, 삶의 태도 측면에서 좀 더 여유롭게 실수와 실패, 손해와 지연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행복조차 추구하고 싶지 않다.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있다. 가는 대신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일. 억지로 가려하면 더 안 오는 일. 잠이 안 와요, 라는 표현처럼 우리가 잠에게 가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삶을 수월하게 살기 위해서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잘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많은 현자들은 말한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은 어느 정도 수용의 자세를 갖고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에 힘을 써야 삶이 그나마 어렵지 않다고 경험을 통해 배운 바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행복과 잠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다. 행복이 내게 오면 감사하지만, 오지 않는다고 애통해하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고 내가 잠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한 지혜를 내가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불필요한 힘을 쓰고 싶지 않기에. 통제 가능한 것들에 힘을 쏟기에도 충분히 저질 체력이니까.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잘 사는 것은 다르다. 지혜로워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지혜롭기를 바란다. 나는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기를 바란다. 잘 사는 사람은 허무를 다스리며 산책하는 사람이 아닐까."

결국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잘 살고 싶다. 정지우 작가가 쓴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책 제목처럼 SNS에는 잘난 것들만 있다. 슬픔과 고통마저도 아름다운 포장지에 싸여 상품화된다.

내 SNS라고 다르겠는가. 매일 좋은 일과 나쁜 일, 기쁨과 고통이 뒤섞여 있지만 SNS에는 미화된 결과물이 전시될 뿐이다. 그런 이미지의 허상을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바라보며 우리는 그것이 진짜인 것처럼 느낀다. 잘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위안의 연고를 정성스럽게 바르고 정신승리의 굳은살을 만든다.

굳은살이 삶의 고통을 덜어줄 순 있다. 그러나 우리가 굳이 굳은살을 제거하는 것처럼, 현실감각을 회복하고 실제로 살기 원하는 자는 말랑한 살결로 이 땅에 선다. 감각의 회복, 너무 연약하지도 않고 너무 딱딱하지도 않은 감각으로 살아가기. 너무 이상주의적이지도 너무 현실주의적이지도 않은 태도로 삶을 대하기. 그러나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저자가 원하는 '희망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삶',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처럼 결핍도 충만도 아닌 그 적정 지점에 서기가 쉽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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