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명대사㊷] 인간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 닥터 차정숙
정숙: 내가 지금 뭐가 이렇게 신났다고 여행을 가는지 모르겠다.
미희: 인간은 말이야, 삶이 위기를 맞이하면 어디론가 떠나야 해. 떠나는 것으로 삶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거든.
정숙: 내 인생의 돌파구는 의사가 돼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거였어. 보라카이 여행이 아니고.
드라마 ‘닥터 차정숙’이 인기다. 방영 5회차 만에 시청률 12%를 넘었다. 채널이 다양해지고 플랫폼이 많아진 요즘, 10%는 인기 드라마의 잣대가 됐다.
왜 그렇게 인기일까? 우선, 의사가 나오고 심폐소생술도 나오지만 의학드라마가 아니다. 전업주부, 20년 경력단절녀의 ‘나, 이제 내 맘대로~~ 살아볼 테다!’ 탈출기이자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던 ‘엄마 닭’이 새로이 ‘병아리’가 되어 껍질을 깨트리고 나오는 성장기다.
그렇다고 영화 ‘82년생 김지영’처럼 진지한 접근도 아니다. 가벼운 코믹터치를 적절히 곁들여 ‘신나게’ 시청하게 한다.
사실, 출연 배우들의 면면만 봐도 코믹극일 것이라는 건 눈치챌 수 있다. 영화 ‘댄싱퀸’ ‘오케이 마담’, 드라마 ‘12월의 열대야’ ‘칼잡이 오수정’ ‘마녀의 연예’에서 코믹연기도 된다는 걸 입증한 엄정화, 뭘 맡겨도 잘하겠지만 보기만 해도 웃음이 새어 나오는 코믹본능의 강자 김병철, 정통 코미디 연기와 발군의 입담을 갖춘 박철민이 포진해 있다.
실제로 차정숙 역의 엄정화는 씩씩하면서도 귀여운 ‘캔디형’ 매력을 구가한다. 억울하지만 참고, 슬프지만 일단 웃어보겠다는 연기는 배우 엄정화가 일인자다. 배우 김병철은 차정숙의 남편이자 동료 의사로 만난 첫사랑 최승희(명세빈 분)와의 사이에서 ‘삼각 스캔들’을 형성 중인 서인호를 맡았다. 김병철은 작곡가 주페의 ‘경기병 서곡’ 리듬 변화에 맞춰 슬슬 몸을 풀다가 우렁찬 말발굽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행진곡을 노트북 키보드를 건반 삼아 연주하며 격정적으로 웃긴다. 외과 과장 윤태식 역의 배우 박철민은 공기를 조였다 퍼지게 하는 쫀득한 말투, 김병철이 뿜어내는 맥주 사례를 받아내는 표정만으로도 웃음 짓게 한다.
굵직한 배우들이 코믹으로 포진해 있으니, 사이사이 정극 연기를 하는 인물들도 더 유쾌하게 보인다. 간담췌외과 과장 로이킴(민우혁 분)의 잘생긴 외모와 다소 뻣뻣한 연기도 흥을 돋우고, 레지던트 커플인 정숙의 아들 정민(송지호 분)과 전소라(조아람)의 티키타카도 더욱 싱그럽다. 정숙의 절친 백미희를 꿰찬 배우 백주희의 저음, 정숙의 시어머니 곽애심 여사로 분한 박준금의 안하무인 연기도 웃음 포인트가 된다.
맞다! 심각하지 않고 경쾌한, 어렵지 않고 가벼운 드라마가 좀 고팠다. 반가움이 크니 만화적 설정에 반감이 앞서지 않는다. 그냥 즐기면 되는 거다.
그렇다고 웃기기만 한 맹탕 드라마가 아니다. 인생, 그중에서도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얘기하는 드라마다 보니 중간중간 명대사가 곧잘 등장한다.
맨 앞에 소개한 정숙과 미희의 대사만 해도 그렇다. 급작스러운 간이식 수술을 겪으며 큰 깨달음을 얻은바, 정숙은 ‘어제와 똑같은 삶을 오늘도 내일도 반복하는 인생’을 바꾸려 한다. 20년 차 전업주부를 졸업하고, 출산과 육아로 중단했던 레지던트 1년 차로 복귀하고 싶어 무던히 공부해서 시험은 잘 봤지만, 사회가 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다리는 건 아니다.
면접에서 떨어져, 남편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단짝 친구와, 미희의 표현을 빌리면 ‘100년 만에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 좀 가보려는데 정숙은 발걸음이 영 가볍지 않다. 정숙이 집을 떠나 향하고 싶었던 곳은 의국이지 보라카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장면에서 귀를 쏙 파고드는, 인생의 중요한 원리를 ‘발견’한 것 같은 대사를 건졌다.
“인간은 말이야, 삶이 위기를 맞이하면 어디론가 떠나야 돼. 떠나는 것으로 삶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거든.”
아! 바쁜 시간 쪼개고 없는 돈 끌어모아 어디론가 떠났던 그때가 삶의 위기에 봉착한 순간이었구나! 정확히 의식하진 못했어도, 돌파구를 찾겠다고 떠났던 거구나. 그것이 인간의 속성이라니, 놀랍기 그지없다.
정숙에게 당당히 떠날 명분을 주는 듯한 미희의 명쾌한 해석, 하지만 정숙은 떠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원하던 곳으로 갔다. 우여곡절 끝 추가합격으로 인생 2막의 기회를 잡는다. 정숙과 미희는 공항에서 얼싸안고 기뻐하지만, 모두가 반가워하는 건 아니다.
당연히 ‘무급의 일급 가사도우미’를 잃은 곽애심 여사, 내연녀와 함께 근무하는 병원에 아내마저 출근하게 된 남편 서인호, 분명 내 남자친구였는데 인호와 정숙의 ‘그날의 분위기’에 떠밀려 낙동강 오리알이 되다 못 해 불륜녀 신세가 된 최승희…까지는 예상했던 바다. 전공의 시험은 나보다 잘 봐 놓고 시시각각 도움을 외쳐대는 엄마에게 짜증을 부리는 아들까지는 ‘엄마손 김밥’으로 달래보겠는데, 고3인 딸의 설움 폭발에는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는 정숙이다.
정숙은 40대 중반의 나이에 젊은이도 힘들어하는 전공의 일상에 지친 몸으로 밤잠을 줄여 김밥을 싼 날, 봉투에 ‘우리 딸’에게 라고 적은 편지를 도시락에 살짝 넣어둔다. 점심밥 먹으려다 편지를 발견한 딸 이랑(이서연 분)의 서리 내린 마음을 녹일 수 있을까.
우리 딸!
이 편지 발견하고 조금 놀랐지?
엄마가 요즘 바빠서 우리 딸 요즘 힘들고 불편한 점이 많을 거야.
근데 다시 생각해 보면 살면은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기도 해.
엄마도 언젠가 너희를 떠나게 될 테니까.
그래서 말인데, 엄마도 한 번쯤은 나 자신으로 살아보고 싶어.
그렇다고 엄마가 너희들의 엄마가 아닌 건 아니잖니?
엄마가 너희들 꿈을 언제나 응원하듯이
너희들도 딱 한 번만 엄마의 꿈을 응원해 줘.
지금 엄마에게 가장 필요한 건 너희들의 응원과 지지야!
사랑해, 내 딸!
엄마가
딸에게 쓰는 편지지만, 자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응원을 청하는 정숙의 마음이다. 인생은 서서히 저물어가는데 더 이상 자식은 품 안에 없고, 내 인생인데 나라는 알맹이 없이 빈 껍데기가 돼 버린 듯한 세상의 많은 부모가 자식에게 쓰는 편지 아닐까.
잊었던 꿈을 다시 꾸기 시작한 정숙의 선택, 적어도 오늘 시청자 여러분의 응원 소리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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