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다이어리]예고된 파산, 베드배스의 버려진 쿠폰

뉴욕=조슬기나 2023. 4. 30.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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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미국 일상 속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미국에선 '베드배스앤드비욘드(BBBY)의 쿠폰은 절대 만료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언젠가 한 미국 드라마에 나오기도 한 대사다. 뉴욕 맨해튼 어퍼웨스트사이드에 거주하는 40대 직장인 제니퍼 랜던호퍼 씨는 대다수 미국인의 집안 서랍 한구석에는 '언제 쓸지 모르는' 베드배스앤드비욘드의 20% 할인쿠폰이 쌓여있다고 말한다. 제니퍼씨도 이미 수년 전 만료된 쿠폰을 내고 할인 혜택을 받은 적이 있다. 한 번에 여러 장을 들고 가 품목별로 할인받기도 한다. 이른바 '쿠폰 위의 회사', 52년 역사의 미 생활용품 소매 체인 베드배스앤드비욘드가 지금껏 성장해온 방법이다.

쿠폰으로 성장한 회사는 결국 쿠폰으로 무너졌다. 수년간 실적 부진으로 자금난에 시달려온 베드배스앤드비욘드는 일요일인 지난 23일(현지시간) '챕터11'에 따른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시장에서는 이미 예고된 파산이라는 평가가 쏟아진다. 적자로 경영 어려움을 겪어온 것만 수년째다. 말 그대로 돈줄이 마르며 회사 경영진들조차 몇 달 전부터 파산 가능성을 경고해왔다. 올 초에는 부채 이자를 갚지 못해 JP모건체이스로부터 채무불이행 통보를 받기도 했다. 파산 신청 시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베드배스앤드비욘드의 부채는 52억달러, 자산은 44억달러다.

지난 25일 직접 찾은 베드배스앤드비욘드 맨해튼 링컨스퀘어 지점은 이미 폐업상태였다. 1년여 전 뉴욕에 도착한 직후, 베개, 겨울용 커튼 등을 구입하기 위해 방문했던 곳이다. 유리창에는 폐업했다는 안내문과 함께 'RIP 베드배스-링컨스퀘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RIP, 즉 Rest in peace는 통상 고인의 명복을 빌거나 묘비에 적는 관용구 인사말이다. 이미 지난 1년간 미 전역의 매장 400여곳을 폐쇄해온 베드배스앤드비욘드는 파산 신청 이후 나머지 매장들도 줄줄이 닫았다. 현재 맨해튼 내에서는 최대 규모인 첼시 지점만 문을 열고 재고를 판매 중이다.

이틀 뒤인 지난 27일 방문한 첼시 지점에는 평소보다 확연히 많은 고객이 확인됐다. 몇초에 1명꼴로 끊이지 않고 손님이 들어왔고, 계산대 앞에는 20명에 달하는 고객들이 늘어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미 일부 선반은 비어있는 모습도 확인됐다. 한 직원은 "일요일에 파산 신청 사실이 보도된 이후 이틀간 쿠폰을 사용하려는 고객들이 몰려와서 특히 바빴다"며 "지금도 손님은 끊이지 않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첼시 지점에서 만난 주부 다이애나 니콜스씨의 쇼핑카트에는 개당 16달러 수준인 오가닉 타월 여러 개와 샤워 커튼, 프라이팬 세트 등이 담겨 있었다. 와플 패턴의 타월이 베드배스앤드비욘드의 베스트셀러라고 말한 그는 "어릴 때부터 베드배스앤드비욘드를 좋아했다"면서도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방문한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고 털어놨다. 파산 신청 소식을 듣고 다음 날인 24일과 이날 연이어 매장을 방문했다는 직장인 샬럿 김씨는 "할인 쿠폰을 쓰기 위해 소식을 듣자마자 (24일에) 왔었다. 그때 고민하다 못산 게 있어서 또 왔다. 집 근처 링컨스퀘어점이 폐업해서 지하철을 타고 첼시까지 온 것"이라면서 "베드배스앤드비욘드가 폐업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베드배스앤드비욘드는 1971년 문을 열었다. 린넨, 목욕제품 중심의 '베드앤배스'에서 1987년 지금의 사명으로 바뀌었다. 창업자들은 전문매장이 소매업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고, 1985년 2만평방피트 규모의 대형 매장을 통해 이른바 '카테고리 킬러'식 매장 콘셉트를 최초로 선보였다. 한 장소에서 다양한 브랜드, 제품, 색상 등을 모두 보고 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후 대대적 쿠폰정책 등에 힘입어 성장을 이어간 베드배스앤드비욘드는 1992년6월 기업공개(IPO)에 성공했고 1999년에는 연매출 10억달러를 돌파했다. 2000~2010년대엔 TV 속에서 베드배스앤드비욘드 매장 모습을 드라마 배경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미국인들의 삶에 녹아졌다.

하지만 베드배스앤드비욘드를 성장시킨 '관대한' 쿠폰 정책은 결국 경영실적 악화로 이어졌다. 매출이 늘어도 순이익이 감소하는 이른바 '쿠폰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늦게서야 부랴부랴 쿠폰 지급을 줄이고 수익성을 개선하고자 했으나, 이미 쿠폰에 익숙해진 고객들의 반발 등 부작용이 불가피했다. 설상가상으로 월마트, 타깃 등 대규모 카테고리킬러 매장들과의 경쟁에서 밀린 것은 물론, 아마존을 필두로 한 전자상거래 기업들의 부상 등 시대적 변화에도 발맞추지 못했다. 여기에 2020년 닥친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은 오프라인 매장 중심인 베드배스앤드비욘드의 사업구조에 직격탄이 됐다. 고심 끝에 내놓은 자체브랜드 출시 전략도 공급망 차질 등으로 실패했다.

베드배스앤드비욘드의 공동창업주인 레오나르드 페인스테인은 20년 전인 1993년 한 인터뷰에서 "백화점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봤기에 전문점이 소매업의 다음 물결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고 성공 배경을 밝혔었다. 다만 그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그다음 물결이었다.

이제 베드배스앤드비욘드의 쿠폰은 만료시한이 있다. 이미 지난 26일부터 쿠폰을 받지 않고 있다. 지난 27일 방문한 첼시 매장에서는 한 남성이 수건을 정리 중인 직원을 붙잡고 왜 쿠폰 혜택을 받지 못하느냐 목소리 높여 항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매장 한 구석에는 고객들이 버리고 간 것으로 보이는, 더이상 사용하지 못할 쿠폰들이 모여 있었다. 매장 입구를 지키던 시큐리티 직원은 언제 문을 닫느냐는 질문에 "재고가 없어지면 언제든"이라고 답했다. 시대에 발맞춰 빠르게 변화하지 못한 공룡의 마지막 뒷모습은 버려진 쿠폰만큼이나 쓸쓸했다.

뉴욕=조슬기나 특파원 seu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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