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은 이해해 달라지만, 힘없는 세입자들은 쓰러진다
[이준목 기자]
최근 전세사기 피해가 급증하면서 수많은 피해자들이 발생하고 있다. 도움받을 곳 없이 벼랑 끝에 내몰린 피해자들 중에는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사례도 속출하는 중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피해자 구제와, 근본적인 전세사기 근절 대책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4월 28일 방송된 KBS1 <시사직격>에서는 '전세사기의 덫-벼랑끝으로 내몰리는 세입자들' 편을 통하여 전세사기를 당한 이후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들의 심각한 현실을 조명했다.
지난 20일에는 전세사기 피해자인 고 박모씨의 장례식이 열렸다. 고인은 향년 31세로 인천 미추홀구에서 전세사기를 당한 이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자신의 집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벌써 이렇게 세상을 등진 피해자만 세 번째다.
고인이 생전에 거주했던 곳은 1개동만 있는 나홀로 아파트로 4년전에 이주해왔다. 고인을 비롯하여 60세대 모두가 전세사기 피해자가 됐다. 작년 1월에 고인의 집은 경매로 넘어갔고, 검찰은 건축주와 공인중개사가 결탁하여 세입자들을 속인 전세사기 범죄로 파악했다.
고인은 전세사기가 발생한 이후 세입자들이 꾸린 대책위에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했다고. 아파트 대표 김병렬씨는 고인이 평소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다고 회상하며 "차라리 힘들다고 솔직히 말했다면 더 관심을 가졌을텐데 항상 웃고 당당했다. 오히려 많이 못 도와드려서 미안하다고 말하던 분"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떠나버린 고인의 집앞에 붙여진 여러 체납경고장들은 그녀의 고단했던 삶을 암시하고 있었다.
고인은 육상 선수로서 국가대표까지 지냈던 전도유망한 인재였다. 은퇴 후에는 인천에 정착하며 애견 미용 카페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전세사기를 당한 이후 그녀의 인생 계획은 송두리째 무너졌다.
보증금 9천만원을 돌려받지 못하게 된 고인은 올해 9월 계약만료를 앞두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피해자의 동생은 "언니는 매일매일을 불안하게 살았고 이렇게 됐는데, 가해자는 여전히 삼시세끼 잘먹으면서 반성도 안하고 살 것이지 않나. 진짜 꼭 처벌받았으면 좋겠다"고 원통함을 호소했다.
박씨가 사망하기전 불과 3일전에는 같은 동네에서 거주하던 27세의 또다른 전세사기 피해자 임모씨 역시 생을 마감했다. 임씨는 고교 3학년부터 식품제조업체에 취직하여 7년간 성실히 근무하여 처음으로 전셋집을 마련했다.
이웃들은 임씨가 생전에 "여기서 자기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2년을 보냈다"고 할만큼 집에 애정이 깊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전세사기를 당한 사실이 밝혀지며 임씨의 삶은 무너져 내렸다. 고인과 같은 아파트에 거주한 동대표 최은선씨는 "2년이라는 시간을 보상하는 게 아니라 그 시간도 없어버리고 지옥을 만들어놨다"며 안타까워했다.
금전적으로 쪼들리던 임씨는 전세사기를 당한 이후 공장을 그만두고 보험회사에 취업했다. 하지만 영업은 적성에 맞지 않았고 임씨는 점점 지쳐갔다. 임씨의 친구는 "20대에 7천-9천만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처음엔 모르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실감이 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인천시 도시회계국에 따르면 미추홀구 예상 피해세대는 약 2500호에 이르며 이중 임의경매로 넘겨진게 1523호, 매각이 완료된 게 87호였다. 피해자들은 대책위를 만들어 그동안 경매를 멈춰달라고 인천시와 정부에 호소했다. 그러나 현실은 노력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박씨와 임씨처럼 많은 피해자들은 당장 '심리적 지원'이 시급한 상황에 몰려 있었다. 제작진이 심리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들에 실시한 심리 스트레스조사에서는 놀랍게도 거의 대다수가 극심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 그리고 자살 충동을 느낀 것으로 확인됐다.
박혜연 동덕여대 임상심리학 교수는 "피해자들 대부분이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힘들만큼 심각한 수준의 급성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이번 사건도 우리가 주목하고 빨리 치료적인 개입을 해서 도와드려야 한다"고 경고했다.
인천 미추홀구 피해자들의 대부분은 바로 '건축왕'이라고 불리운 종합건설사 대표 남 회장이라는 인물에게 사기를 당했다. 피해자들이 사기를 당한 중개인 대부분은 남 회장의 지시를 받는 바지임대인이었다.
남회장은 계약이 성사될 때마다 높은 수수료를 지급했고, 부동산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중개에 나섰다고 한다. 부동산들은 세입자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만일의 상황에서 변제를 약속하는 '이행보증서'를 작성했지만 이는 효력이 없었다.
전문가들은 "4억짜리 아파트를 임대계약하면 중개 수수료가 3퍼센트(약 120만원이)다. 1억 2천짜리 아파트를 중개하면 수수료로 30만원을 받는 중개사가 보증금 전액을 보증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라고 설명했다. 높은 중개료를 내세우며 유혹해왔지만 나중에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거절한 중개한 일들도 있었다.
남 회장 일당이 보유한 인천 지역 주택만 2700여 채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의 건설회사는 동해안 망상1지구 개발사업의 시행업체로 선정되었으나 자금난에 시달리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동해시에 따르면 해당 부지는 경매개시 결정이 나서 경매를 앞두고 있으며 남회장은 토지를 확보하지 못하여 사업개발권이 취소될 상황에 놓여있다.
남회장은 자금난이 악화되자 세입자들의 전세자금을 증액해서라도 돈을 구해올 것을 중개사들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그는 지난해 12월 법원의 첫 영장실질심사에서 세입자들에게 전세보증금제를 약속하며 구속을 피했지만, 약속이 지켜질지는 불투명하다. 남 회장 측은 당장은 돈이 없다면 사업이 정상화하고 지분을 매각해야만 인천 세입자들에 지급할 비용을 마련할수 있다는 입장이다. 피해자에 대한 남회장의 사과 입장 표명 등은 전혀 없었다.
남 회장은 결국 올해 2월 구속 기소되어 재판이 진행중이다. 1차 기소때만 해도 161명이던 피해자는 검찰 추산 800여 명에 피해 규모는 500억원 대까지 불어난 상태였다. 남 회장은 사기 의도를 강하게 부인하고 있지만 이는 전세사기 사건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양상이다. 전세사기 범죄가 성립되는 핵심은 결국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고 그럴 의지가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세사기는 인천 외에도 곳곳에서 속출하고 있다. 경기도 화성시 동탄신도시에서는 동탄 일대에서 오피스텔만 250여 채를 이른바 '오피스텔왕'이라고 불리우는 박아무개 부부, 강서구 일대에서는 '빌라왕'으로 불린 황모씨 모녀 등에 의하여 전세 계약한 다수의 임차인들이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여 집이 경매에 넘어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부 세입자들은 사기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고 꼼꼼히 사전에 증빙서류를 확인했음에도 함정에 빠지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또한 세입자는 계약해지 소송을 내서 승소했음에도 돈을 받으러 가니 황씨가 "돈이 없으니 집빼서 가져라"라고 잡아뗐다고 폭로했다. 세입자는 4개월이 넘도록 한푼도 돌려받지 못했다고.
이러한 전세사기에는 흔히 '브로커'가 동원되기 일쑤다. '빌라의 신'이라고 불리운 권아무개씨는는 브로커를 동원하여 공시지가와 전세가격을 조작하는 방식을 썼다. 세입자들은 전세계약을 맺은 이후 얼마되지않아 임대인이 권씨로 바뀌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집주인 권씨의 세금체납으로 집이 압류될 위기에 처한 구로 전세사기 피해자 정영일 씨는, 경매 자금이라도 구하기 위하여 하루 열시간 넘게 고된 일을 하고 있었다. 정씨는 "하루에도 몇천번씩 생각한다. 내가 멍청해서 당한 건가. 저 사람들이 똑똑해서 그랬던 건가.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일을 해냐"라고 허탈해했다.
이러한 전세사기의 규모는 수도권을 넘어 전국적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올해초 파악된 빌라왕만 전국에 170여 명, 전국 특별단속이 시작된 지난해 7월부터 접수된 피해금액은 3천 억을 넘겼다.
하지만 수천명의 피해자들은 실질적인 구제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범죄수익중 몰수 추징액은 전체의 1%도 되지 않으며, 수사 측면에서도 많은 피의자들이 잠적했고 검거되어도 이중 10분의 1만 구속되는 데 그쳤기 때문. 한없이 더딘 수사 속에 피해자들만 이 막막한 현실을 홀로 감당하며 벼랑끝으로 내몰려야 했다.
정부는 지난 4월 18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로 경매중단을 전격 지시했다. 작년부터 정부가 내놓은 전세사기 피해대책은 총 22건인데 이중 20건이 지난 3월 이후에야 나왔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작년 하반기부터 이슈가 있었는데 왜 대책마련이 늦었냐는 질문에 "피해자 지원센터는 9월부터 운영해왔고, 사기범 특별반속은 지난해 윤석열 정부 출범한 직후 6월부터 진행하고 있다. 예방대책은 4차례에 걸쳐 충분히 만들었다"고 해명했다.
이어 "미리 전세사기를 막고 처음부터 다 해줬으면 좋지 않았겠느냐는 안타까운 마음은 이해가지만, 윤석열 정부는 지난 시기에 터진 전세사기 문제에 대하여 국가의 최우선순위로 삼고 진심으로 대책을 세워서 돕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달라"고 변호했다.
장관은 이해를 당부했지만 죄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먼저 당하고 있다. 인천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중 한 명인 이지영씨는 "젊은 친구들이 자꾸 죽어나가니까 '우리가 잘못해서 이렇게 됐나?'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기성세대들이 잘해야 하는데 그냥 하루하루 살기 바쁘다"라고 말하며 오히려 미안해했다. 지영씨는 그나마 최우선 변제금 대상으로 분류되어 일정액만이라고 보상을 받게되어 운이 좋은 케이스라 다른 분들에게 미안하다"고 안타까워했다.
전세는 이제 막 인생의 사회적 기반을 다져나가는 청년층과 서민들에게 주거를 제공하는 역할을 해왔다. 전세사기는 바로 그 취약한 계층의 꿈과 희망을 짓밟은 악질적인 범죄다.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탓이 아닌가하는 자책감 때문에 더 괴롭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이는 세입자들 개인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피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건축왕, 오피스텔왕, 빌라의 신이라는 각종 신조어와 전세사기 열풍이 탄생할 수 있었던데는, 무자본 갭투자를 가능하게 한 제도와 이를 악용한 투기꾼들, 경계의 책임을 게을리한 정부 당국이 함께 초래한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더 이상의 안타까운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적극적인 대처와, 가해자들에 대한 엄중한 법의 처벌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