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만 국민 죽었는데... 책임지지 않은 자를 기리자?

박광홍 2023. 4. 2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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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史람] 비껴간 심판의 역사를 드러내는, 4월 29일 '쇼와의 날'

[박광홍 기자]

일본에는 4월 말에서 5월 초에 이르는 황금연휴가 존재한다. 헌법기념일(5월 3일), 녹색의 날(5월 4일), 어린이날(5월 5일)과 같은 공식적인 축일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물론, 메이데이(노동절, 5월 1일)를 휴일로 정하고 있는 회사들도 많다. 이러한 사정으로 많은 일본인들은 이 '골든위크'(ゴールデンウィーク)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휴가와 여행을 계획하기도 한다.

골든위크의 시작을 알리는 공휴일은 바로 4월 29일 쇼와의 날(昭和の日)이다. 이날은 패전 이전의 일본 사회에서 '천장절'(天長節)이라고 불리는 중요한 축일이었다. 4월 29일은 바로 1928년 보위에 오른 쇼와 천황의 생일이다.
  
▲ 1928년 즉위 당시의 쇼와 천황(만 27세) 일본에서 '쇼와시대'는 그의 치세였던 1928년에서 1989년 사이를 일컫는다.
ⓒ wiki commons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패전으로 천황의 신성성과 절대성을 통해 국가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국체관념은 공공부문에서 해체되었다. 그러나,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군최고사령부(GHQ)가 천황제 유지를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쇼와 천황에 대한 문책을 단념하면서 한때 살아있는 신으로 제국에 군림했던 쇼와 천황은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이후 천장절은 '천황탄생일'(天皇誕生日)로 개칭되었다. 1989년 쇼와 천황이 사망하고 아키히토 황태자가 즉위하게 되면서 천황탄생일의 날짜 역시 바뀌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기존의 4월 29일은 '녹색의 날'로서 공휴일의 지위를 유지하다가, 자민당을 위시한 보수계열 정당들의 줄기찬 발의 끝에 2007년 '쇼와의 날'로 다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녹색의 날은 5월 4일로 변경).

'국민의 축일에 관한 법률'은 이 쇼와의 날에 대해 "격동의 나날들을 거쳐 부흥을 이루어 낸 쇼와의 시대(일본에서는 천황의 연호에 따라 시대가 구분되는 경향이 강하다. 쇼와시대란, 쇼와 천황이 즉위했던 1928~1989년 사이를 가리킨다)를 돌아보며 나라의 장래를 생각한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법률에서 논하고 있듯, 일본의 전후 부흥과 고도경제성장이 이루어진 시기라는 점에서 이른바 쇼와시대는 많은 일본 대중들에게 향수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다 하여도, 일본의 전성기를 기념하는 축일이 옛 천장절, 즉 쇼와 천황의 생일로 설정된 것은 일본의 진보좌파 진영과 시민사회 일각에게 용납할 수 없는 사태였다.

정말 천황이 국민을 구했을까
  
▲ 백마를 타고 육군 병력을 사열하는 쇼와 천황 백마를 타고 벌이는 군 사열은 천황에게 신성성을 부여하는 장치 중 하나였다.
ⓒ wiki commons
 
쇼와 천황의 전쟁책임은 오랜 세월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가령, 필자가 석사 과정 당시 인터뷰를 진행했던 일본군 출신자 기시 우이치씨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관련기사: '가미카제'의 최후를 본 96세 일본 노인의 증언 https://omn.kr/1ru2e).
 
모두들 다 도조가 나쁘다고 해요. 이만큼 인간을 말이지, 망쳐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죽을 죄입니다. 책임을 져야죠. 천황폐하께서는 이제 전쟁은 안된다고 하셨는데 그걸 거스르고 저질렀으니까. 그건 안될 일이죠. 천황 폐하는 좋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도조가 전권을 쥐고 있던 인간이니까, 뭐 폐하께서 승낙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어쩔 수 없지 하신 것이죠. 도조가 이미, 모두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이죠. 뭘 어쩌겠어요. (중략) 역시 종전하고 나서는, 폐하께서 전쟁을 하시지 않으셨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폐하는 책임이 없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군인이 그렇게 한 것이고, 폐하는 전쟁을 원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이죠.
(박광홍,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 오월의봄, 2022, 195~196p)
 
천황의 무결성 뒤에 숨어 자신들의 면피를 시도했던 일부 정객들과 고급 장교들, 새로운 일본에 대미협조 체제를 구축할 필요성이 절실했던 미 점령군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쇼와 천황의 전쟁책임 관련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관련 기사: '사형을 피하라'... 패전 후 일본 속 또다른 전쟁 https://omn.kr/1vtn9). 이러한 배경 아래서 도조 히데키 대장을 비롯한 육군 측 인사들이 도쿄재판에서 사형되는 것으로 전쟁책임에 대한 사법적 심판은 끝을 맺게 되었다.

전쟁을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강행한 육군에 비난의 화살이 향하는 동안, 쇼와 천황은 평화를 원했음에도 '무도한' 육군에게 억지로 끌려다닌 무력한 존재로 묘사되었다. 오히려, 천황이 전쟁 막바지에 육군의 폭주를 억누르고 '성단'(천황의 주요 국책 결정을 성스러운 결단으로 높여 부르는 말)을 내려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다는 점에서 '천황이 국민을 구했다'는 인식마저 확산되었다. 그렇다면, 도쿄재판의 결과나 전후의 천황관에서 읽히는 바와 같이 쇼와 천황은 과연 전쟁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육군 부대들이 독단적인 군사행동을 벌여 중국에 대한 침략도발을 자행했을 때 쇼와 천황이 불쾌감을 표했던 사례, 1941년 태평양 개전을 앞두고 쇼와 천황이 불안감을 표하며 개전 재검토에 대한 압력을 행사했던 사실 등은 여러 교차검증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 쇼와 천황의 어전에서 실시되는 대본영회의 '대일본제국헌법'상 쇼와 천황은 육해군의 대원수로서 그 통수권을 가졌다.
ⓒ wiki commons
 
쇼와 천황은 제국 헌법 아래서 명실상부한 '육해군의 대원수'였으므로, 군부가 그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전면전쟁을 강행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다. 쇼와 천황은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선택지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결국 반대의 뜻을 강경하게 굳히지 못하고 개전 강행에 동의했다.

그리고, 처음에 본인이 품었던 우려와 달리 개전 직후의 일본군이 서구 열강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자 쇼와 천황은 이를 매우 흡족해했고, 이러한 성공을 일구어 낸 도조 히데키 대장을 총애했다. 도조 히데키 대장은 기존의 내각총리직과 육군대신직 뿐만 아니라 육군참모총장, 외무대신,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 등 여러 직책을 겸임하며 독재적 권력을 구축하고 헌병대를 이용해 반대파를 억눌렀는데, 이는 제국의 유일한 주권자인 천황의 동의와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도조 정권에 대한 쇼와 천황의 신임은 전황의 악화와 함께 무너져내렸다. 그러나, 도조 정권의 퇴진으로 쇼와 천황의 현실 인식이 바로 잡히지는 않았다. 보도가 통제되고 육해군이 스스로의 실책을 은폐하는 가운데, 쇼와 천황은 제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정확하고도 가장 방대한 정보를 보고받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제국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군부가 주장하는 반격의 성과에 헛된 기대를 걸며 '종전 공작' 제안에 미지근한 반응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레이테만 해전의 참패와 가미카제특공대의 등장으로 군부가 주장했던 실질적 반격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 오히려, 절체절명의 국면에서 쇼와 천황은 적극적으로 작전에 개입하며 국민들의 희생을 극대화시켰다.

쇼와 천황은 병력과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지구전 수행을 위해 부득이하게 비행장을 포기한 오키나와의 제32군의 방침에 노여움을 드러내며 '비행장 탈환'을 채근했다. 천황의 채근을 거스를 수 없었던 제32군은 결국 무리하게 비행장 탈환을 시도하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는 오키나와 방어전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관련 기사: 부상병에 '청산가리 우유'... 일본 교과서에서 삭제된 또다른 비극 https://omn.kr/23ect).
  
▲ 무리한 비행장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일본군 장병들 점령된 요미탄비행장에 '강행착륙'하여 일시적으로 그 기능을 마비시키는 피해를 입힌 '의열공정대원', 급조폭탄을 어깨에 두르고 전차로 돌격하다가 사살된 소년병,콘크리트 블럭 무게추를 허리에 두른 특공기의 파일럿 등의 사진이 남아있다.(오키나와 구 해군사령부호 소장)
ⓒ 박광홍
 
뿐만 아니라, 쇼와 천황은 '항공기가 모두 특공에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수상함대는 어째서 놀고 있느냐'며 해군 군령부를 꾸짖었다. 레이테만 해전으로 연합함대가 궤멸되면서 일본해군에 의한 유의미한 수상작전은 이미 불가능한 것이 되어 있었지만, 해군은 감히 천황의 꾸중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전함 야마토를 비롯한 잔존함대가 오키나와 수비대를 지원하기 위한 '해상 특공' 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항공 엄호나 가용연료를 확보하는 것조차 지극히 곤란한 상황에서 강행된 수상 특공 작전은 당연히 파국으로 귀결되었다. 오키나와로 향하던 일본 해군 제2함대는 미군의 공습을 무력하게 얻어맞고 허망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전함 야마토와 경순양함 1척, 구축함 4척이 격침되고 4044명의 해군 장병이 수장되는 동안, 미군은 겨우 13기 정도의 함재기를 잃었을 뿐이다(관련 기사: 사상 최대규모 일본 전함은 왜 '자살작전' 내몰렸나 https://omn.kr/1y3ui).
  
▲ 미군의 맹폭을 받는 전함 야마토 충분한 연료는 물론 항공 엄호조차 보장받지 못한 일본군의 잔존 함대는 미 해군항공대의 공격에 무력하게 궤멸되었다.
ⓒ wiki commons
 
쇼와 천황의 무리한 작전 개입으로 수많은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고 전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미 파멸 직전까지 내몰린 제국 일본에는 연합군에 제시할 수 있는 협상의 카드조차 거의 남지 않았으므로, 이전에 제안된 '종전 공작'조차도 이미 비현실적인 발상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소련은 일본 측의 종전 중재 의뢰를 단칼에 거절하고 대일전에 참전하였다.

쇼와 천황을 평화의 옹호자로 미화하는 측에서 이야기하는 종전의 '성단'이 이때 비로소 등장한다. 군부가 4가지(천황제 유지, 일본의 주권을 보장하는 점령, 일본에 의한 자체 무장해제, 일본에 의한 자체 전범재판)를 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고집하는 가운데, 쇼와 천황은 외무부의 뜻에 따라 '천황제 유지'라는 한 가지 조건만을 걸고 연합군과의 교섭에 나설 것을 결정했다. 천황제 유지를 타진하는 일본 측을 향해, 미국은 전후 천황의 지위가 '연합국군사령부의 제한 하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회신했다(관련 기사: "일억 국민 쓰러져도..." 일본 군인이 지키고자 했던 것 https://omn.kr/1ural).

이 애매모호한 회신에 군부는 극렬하게 반발하며 본토결전을 재차 주장했다. 처음에 외무부의 손을 들었던 쇼와 천황 역시, 군부의 거듭된 반대에 동요하며 '재협상'으로 입장을 선회하기까지 했다. 만주와 북조선으로 진격하고 있는 소련군이 언제 홋카이도로 진입할지, 세 번째 원자폭탄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천황의 지위를 확답 받기 위해 재협상을 벌인다는 것은 나라의 멸망을 담보로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원로들과 외무부의 간절한 설득으로 쇼와 천황은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군부의 반대를 무릅쓴 포츠담 선언 수락의 '성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이 성단은 당시 많은 이들에게 '일본 국민을 위한 결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 해도, 천황의 이름으로 310만에 달하는 국민들이 전쟁에서 죽어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미국에 대한 협조로 기회를 엿보던 고노에 전 총리조차, '천황이 퇴위하고 절에 은거하며 전몰장병들의 넋을 위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혔을 정도였다.

아무런 책임 지지 않고... 여생을 마쳤다 
  
▲ 방일한 레이건 미 대통령 부부를 환영하는 쇼와 천황(1983년) 전후 일본을 접수한 미국은 일본에서의 대미협조 체제 구축을 위해 쇼와 천황의 존재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 wiki commons
 
쇼와 천황이 재판을 받는 일, 퇴위나 은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1989년까지 천수를 누리며 일본의 천황으로서 여생을 마쳤다. 그리고, 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결여된 채 그의 생일이 '쇼와의 시대'를 기념하는 축일로 지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천황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과 국가폭력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시민들은, 여전히 '쇼와의 날'에 대한 의문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국민을 희생시키고도 책임을 회피한 지도자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역행은 비단 일본 사회만의 일이 아니다. 이 지점이야 말로,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어 역사를 들여다보고 화해를 도모하는 풀뿌리 단계의 연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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